매주 종로구 일본 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의 수요 시위 1000회를 하루 앞둔 12월 13일 일본종군위안부 피해자인 김요지 할머니가 영등포구의 한 요양병원에서 향년 87세로 별세했다. 김 할머니는 1924년 전주에서 태어나 17세 때, 또래 여성 7명과 함께 `여자정신대`라는 이름으로 끌려가 중국 각처에서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했다. 8?15 해방으로 고향에 돌아와 가족을 만났으나 `몸을 버렸다`는 생각에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고 어렵게 생계를 꾸리며 살아왔다. 앞서 12일에는 위안부 피해자 중 최고령인 94세의 박서운 할머니가 중국에서 별세해서 올해만 16명의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현재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234명 중 생존자는 국내 57명 해외 6명 등 63명으로 줄었다.
"그동안 말하고 싶어도 용기가 없어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일장기를 보거나 정신대의 `정` 자만 들어도 가슴이 울렁거립니다" 1991년 8월 종군위안부 출신 김학순 할머니가 기자회견을 열었다. 김 할머니도 17세 때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가 하루에 4∼5명을 상대해야 했던 끔찍한 기억을 털어놓았다. 일본이 종군위안부의 존재 자체를 잡아떼던 시절이었다. 피해 당사자인 김 할머니의 증언 덕에 역사의 암흑 속에 묻혀버릴 뻔한 반세기 전 일제 만행이 물위로 떠올랐다.
그 직후 `흰 옷고름 입에 물고`라는 제목을 달고 출간된 종군위안부 15명의 증언집 내용은 책장을 넘기기가 힘들 정도였다. "폭행을 당한 뒤 아랫배가 너무 아파 걷지도 못했습니다" "공습이 한창일 때도 위안소 앞에는 군인들이 줄을 섰었습니다" "그들은 조선말을 했다는 이유로 친구의 목을 잘랐습니다" …할머니들은 "사죄와 보상이 실현돼 한이 풀리기 전에는 절대로 죽을 수가 없다"고 했다.
1992년 1월 8일 수요일, 살을 에는 추위 속에 일본대사관 앞에 종군위안부 할머니들이 모였다. 며칠 뒤 방한하는 미야자와 일본총리에게 일본정부 차원의 공식사죄와 법적배상을 요구하기 위한 시위였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일본총리가 말로만 한 사과뿐이었다. 그 후 할머니들은 매주 수요일 일본대사관 앞에 모여 시위를 이어왔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어김없이 열린 그 집회가 지난 14일로 1000회를 넘겼다. 할머니들의 분노의 목소리는 나라 안팎의 주목을 받으며 일본의 성(性) 만행을 고발하는 마당이 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 그야말로 마이동풍이다. 위안부 동원 사실을 부인하고, 1965년 한?일협정으로 식민지배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 문제는 끝났다는 입장만 낡은 레코드판마냥 되풀이하고 있다. 1998년 유엔 인권소위원회가 일본정부의 배상을 요구한 `맥두걸 보고서`를 발표했는데도 여전히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14일 위안부 할머니들이 시위를 하는 그 자리에 `평화의 비`가 세워졌다. 정대협이 20년에 걸쳐 1000번째에 이르는 기네스북에 오른 수요시위를 기념해서 시민 성금 3000만 원을 모아 제작한 것이다. 비석이라고 하지만 재질은 청동이고 치마 저고리 차림에 단발머리를 하고 의자에 앉은 130cm 높이의 소녀상이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일본군에 끌려갔던 14∼16세 때를 재현한 것이다. 한 많은 세월을 따라 백발이 됐지만 아직도 평화롭고 꿈많은 어린 시절을 잊지 못하고 있음을 표현했다. 대신 조각상 옆 바닥에 오석(烏石)으로 깐 소녀의 그림자는 쪽진 머리에 등 굽은 할머니들의 현재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소녀의 왼쪽 어깨에는 새 한 마리가 앉아 있고, 할머니의 가슴에는 나비가 새겨져 있다. 먼저 세상을 떠난 할머니들과의 교감을 뜻한다. 소녀의 발은 맨발이고 발뒤꿈치는 차마 땅에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 두 손은 가지런히 양 무릎 위에 올렸으나 주먹을 불끈 쥐고 있다. 소녀 곁에는 빈 의자 하나가 놓여 있다. 할머니들의 고통에 공감하면 누구나 앉으라는 의미이다.
이제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그동안 우리 정부는 이 문제로 일본에 대해 적극적으로 압박하는 것을 사실상 꺼려왔다. 오죽하면 헌법재판소가 지난 8월에 "위안부 배상 문제에 국가가 적극 나서지 않는 것은 피해자의 인권을 침해한 것"이라며 위헌 결정을 내렸을까? 그런데도 10월 서울에서 열린 노다 요시히코 일본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위안부 문제를 거론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000회의 수요시위를 넘기고서야 일본 교토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군대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진정한 용기를 가져야한다"고 했다. 이에 대해 노다 총리는 "인도주의적 견지에서 지혜를 낼 것"이라는 뜬구름 잡는 소리만 했다. 그러면서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설치된 평화의 비 철거를 요청한다고 적반하장의 말을 내뱉었다.
정말로 이제 시간이 촉박하다. 조금만 더 지나면 일본은 진정으로 사죄할 대상을 마주할 길마저 잃게 된다. 일본의 침묵은 여성들을 일본군 성노예로 내몬 비인도적 범죄행위와 다를 바 없다. 위안부 문제를 공식 인정하고 사죄?배상하지 않는 한 일본은 지구촌의 평화와 공존을 거론할 자격 없다. 우리 정부도 이 문제에 대해 더 이상 우물쭈물한다면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부라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