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초전초등학교와 성주중학교를 다닐 때의 추억이다. 방과 후 학생들이 모두 귀가하고 나면 학교가 조용해진다. 이때다 싶어 나와 내 동생은 초등학교 빈 교실을 찾아갔다. 어떤 때는 초등학교 선생님에게 허락을 받기도 하고 어떤 때는 무단침입을 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해서 용케 교실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우리는 곧장 가방에서 책 대신 탁구공과 목제라켓을 꺼내고 부산히 간이 탁구대를 만들었다. 칠판 밑에 있는 커다란 교단을 책상 위에 올려놓으면 그것이 곧 탁구대가 되었다. 긴 판자로 탁구네트를 삼아야 했지만 시골에서 유일하게 즐길 수 있는 실내체육이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며칠이 안 되어서 일어난 일이다. 아버님께서 우리 두 형제에게 밭에 가서 김을 매라고 하명을 하셨다. 그런데 요령이 좋고 꾀를 잘 부리는 내 동생이 나에게 들로 가는 대신에 초등학교로 가자는 것이었다. 한참 탁구에 열중해서 티셔츠에 땀이 흠뻑 젖었을 무렵에 아버님이 나타나셨다. 당신이 들에 가서 보니 정작 김을 매야 할 우리 형제는 없었으니 화가 단단히 나신 모양이었다. 우리가 초등학교에서 탁구를 치고 있는 것을 용케 아시고 학교로 오셔서 우리를 데리고 집으로 가셨다. 당신의 말을 안 듣고 부모를 속이면서 탁구를 친 우리에게 단단히 화가 나셨던 것이다. 나이 어린 동생이 무얼 알겠냐고, 일하기 싫으니깐 형이 된 내가 동생을 꼬셔서 탁구를 치러 갔다고 단정하시고 매를 드셨다. 스무 대는 더 맞았을 무렵에야 보다 못한 동생이 자기가 제안해서 탁구를 쳤노라고 이실직고 하였다. 그렇게 되어 나는 더 이상 얻어맞지 않게 되었다. 물론 동생은 아무리 잘못해도 아버님이 야단을 치는 법이 없었으니 그가 무사했던 것은 그저 당연한 일이었다.
시골에서 자란 우리 초중등학교 학생의 또 다른 방과 후 활동은 학교 풍금을 치는 일이다. 풍금이 있는 교실은 대게 열쇠로 잠구어 놓는 것이 관행이다. 그래서 선생님의 허락 없이 그 교실에 들어가기란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라디오나 TV도 없던 그 시골에서 학교 재산 제1호인 풍금을 치는 것이 우리 예술생활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했기에 우리는 기를 쓰고 풍금이 있는 교실에 들어가려고 애썼다. 물론 선생님에게 허락을 받고 풍금을 치는 날도 있었는데 이는 운수대통한 날의 일이고 보통은 그렇지 못했다.
어느 날 방과 후 풍금이 있는 방 뒷문을 통째로 들어내고 우리가 한참 풍금 치는 일에 열중하고 있을 때였다. 숙직하러 오신 선생님이 숙직실로 들어가다 말고 풍금 소리를 따라 우리에게 다가오셨다. 누구의 허락을 받고 들어 왔느냐고 불호령이 떨어졌다. 대개의 경우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먼저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면 면장의 아들들이니 봐 준다고 하시면서 넘어가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이날 숙직선생님께서는 집에서 무슨 기분 나쁜 일이 있으셨는지 면장 아들이면 다냐, 면장 아들이면 다른 학생보다 더 잘해야 되지 않겠느냐면서 우리 형제를 꿇어 앉히고 벌을 주셨다. 워낙에 박복한 나인지라 면장이셨던 아버님 덕을 보기는커녕 오히려 더 심하게 야단을 맞아야 했다. 부모 덕 못 보는 놈은 선생 덕도 못 본다고 하더니 나를 두고 하는 말이었는지?
시골학생의 방과 후 유일한 스포츠는 핑퐁이오, 유일한 예술 활동은 오르겐 연주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으리라 짐작된다. 학교 앞에 살았던 우리 형제의 낭만이라고나 할까?(2006. 6.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