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 개몽활동 구한말 망국을 앞두고 활동을 시작한 선생은 을사조약 때 스승인 이승희와 함께 상경하여 이완용, 이지용, 박제순, 이근택, 권중현 등 을사오적을 참형에 처하라는 상소를 고종에게 올렸다. 그 뒤 일진회의 매국도당들이 한일합병론을 제창할 때에 "역적을 치지 않는 사람 또한 역적이다"라는 격문을 돌리고 동지를 규합하여 중추원과 일간신문에 성토문을 보냈다. 이 사건으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성주경찰서에서 8개월 간의 옥고를 치렀다. 한편 대한협회 성주지부를 조직하여 "나라를 구하려면 모든 구습을 개혁해야 하고 구습의 개혁은 계급타파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라고 주창하였다. 또한 단연회를 통한 국채보상운동과 선조 동강 김우옹을 모신 청천서원에 `성명학교`라는 사립학교를 설립하여 신교육을 펼쳤다. 선생의 청년기 활동이 비록 지방에 국한된 것이긴 했지만 구한말 계몽사상가들의 애국적 정치문화 활동의 일환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나라가 경술국치를 당하게 되자 선생은 "선비로서 세상에 산다는 것은 치욕이다"라며 통음과 미치광이 노릇으로 나날을 보내다가 모친의 엄한 훈계로 4, 5년간 두문불출, 독서로 유학에 정진했다. 이후 선생의 독립운동에 중요한 소양이 된 학문적 축적과 한문 문장의 창달을 모두 이 시기에 기반을 닦은 것이다. 심산은 원래 행동성이 강한 체질이었으나 청년기에 있어서 그의 스승인 이승희나 곽종석의 의병활동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심산의 독립운동은 낡은 화이론에 입각한 `척사위정`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근대 국제관계의 현실적 상황 속에서 우리 조선을 위치시켜 그 독립주권의 회복과 보장을 받으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심산의 독립운동은 자연히 대외적으로 선전 섭외활동을 중심으로 출발하게 되는데, 이는 바로 대내적인 국내 민중운동이라 할 수 있는 3·1운동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파리장서 사건 1919년의 `파리장서 사건`은 심산의 대외적인 선전·섭외 활동의 첫걸음이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기회를 놓친 심산은 3월 1일 발표된 선언서에 유교 대표가 한 명도 없음을 보고 "망국의 책임을 져야 할 유교가 이번 독립운동에 참여치 않았으니 세상에서 고루하고 썩은 유교라고 매도할 때에 어찌 그 부끄러움을 견디겠는가?"라고 통탄했다. 그 후 심산은 곧 3·1독립선언이 민심을 자극시켜 국내적으로 큰 전기를 마련했으니 이제 필요한 것은 국제적 활동이라고 생각했다. 더구나 "각 종교대표자들은 구속될 것이니 불행 중 다행으로 남아있는 유교 대표가 국제활동의 사명을 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심산은 전국 유림을 규합하여 파리평화회의에 장서를 제출할 것을 추진했다. 그러나 거국적 유림의 단합을 얻으려 했던 심산은 일반 보수적 유생들의 지역·학통·사색당파·사고의 차이 때문에 단합을 쉽게 이루어 낼 수 없었고, 곽종석, 김복한 등 영남과 충청도 유림 137명의 연명으로 된 장서를 작성하여 극비리에 출국 상해로 향했다. 상해에서 독립운동 동지들과 의논 끝에 독립청원서를 영역(英譯)하여 이미 파리에 가있는 김규식에게 보내 회의에 제출하게 했다. 또한 이 장서를 수 천부 인쇄하여 중국의 정계·언론계, 여러 외국의 대사·공사·영사관 그리고 해외 각처 교포들의 거류지와 국내 각 지방 향교에 빠짐없이 우송했다. 이에 당황한 일제는 곧 국내 유림에 대한 일대 검거를 자행, 500여 명이나 체포되는 대옥사가 일어났는데, 이것이 소위 `제1차 유림단 사건`이다. 그것은 독립운동에 있어서 유림의 참여라는 소극적 의의를 넘어 국내 민중운동을 바탕으로 민족의 의지를 세계만방에 천명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더욱 큰 것이었던 바, 바로 심산의 주동에 의한 것이었다. □임시정부 및 중국 내의 활동 파리에 가려던 계획을 중지하고 중국에 머물러 있던 심산은 여러 인사들과 회합을 가지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협의하였고, 임시의정원의 개설기에는 경상북도를 대표하는 의원으로 활약했다. 한편 중국과의 대일 공동항쟁을 위하여 유학과 한문학의 교양을 구사하여 중국인과의 교제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심산은 중국의 정치지도자, 학계, 언론계인사 및 외교가들을 상대로 그의 선전·섭외 활동의 제2보를 시작하게 된다. 심산은 손문(孫文)의 광동군정부 계통의 인사들과의 결탁을 추진하기로 노선을 정하였고, 마침내 중국국민당 중의원 능월(凌越)을 통하여 손문과 단독회견을 가지게 되었다. 심산은 이후 광주로 가서 중국국민당 군정부 요인들과 두루 접촉하여 각계인사 300명이 참가한 가운데 `한국독립후원회`를 결성하였고, 이어 상해에 있는 임시정부를 돕기 위한 모금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별도로 한국유학생의 학자금을 마련하여 상해의 유학생 중 50여 명을 광동으로 불러 불어·영어·중국어 특별 강습을 시키면서 모든 경비를 부담했다. 1920년 중국 광동정부가 붕괴되자 후원회 자금을 관리하던 책임자 또한 행방이 묘연하여 심산은 부득이 유학생을 이끌고 상해로 돌아왔다. 그러나 실의에 빠지지 않고 우리 임시정부 인사와 중국 각계인사 천여 명의 회원을 가진 중한호조회를 발족시켜 상호간의 유대를 긴밀하게 했다. 또한 임복성(중국공교회 회장)의 출자로 상해에서 박은식과 사민일보(四民日報)를 창간하여 일간 만여 부 중 2천여 부를 국내로 우송하였고, 얼마 뒤 북경으로 와서 다시 단재 신채호가 경영하는 천고(天鼓)라는 잡지에 가담하여 함께 일하기도 했다. 그 목표는 동양평화를 위한 일본제국주의 타도와 한·중 두 민족의 혁명세력의 단결이었다. 이 또한 심산이 추구하였던 선전·섭외 활동의 중요한 업적이었다.
최종편집:2025-05-22 오후 05:49:07
최신뉴스
트위터페이스북밴드카카오톡네이버블로그URL복사
이름 비밀번호
개인정보 유출, 권리침해, 욕설 및 특정지역 정치적 견해를 비하하는 내용을 게시할 경우 이용약관 및 관련 법률에 의해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유튜브페이스북포스트인스타제보
PDF 지면보기
오늘 주간 월간
출향인소식
제호 : 성주신문주소 : 경북 성주군 성주읍 성주읍3길 15 사업자등록번호 : 510-81-11658 등록(발행)일자 : 2002년 1월 4일
청소년보호책임자 : 최성고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 경북 다-01245 개인정보관리책임자 : 최성고e-mail : sjnews1@naver.com
Tel : 054-933-5675 팩스 : 054-933-3161
Copyright 성주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