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산은 서울 명륜동 자택에서 6.25를 겪었다. 서울이 점령당한 적 치하 때 일이다. 중국공산당(연안파) 부수상 김두봉은 심산의 인품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사흘이 멀다 하고 심산을 찾아와 성명서 발표를 요구했다. 그때마다 심산은 공산당에는 절대로 동조할 수 없다고 완강하게 거절했지만, 거절에도 한계를 느꼈다. 당시의 분위기로 끝까지 버티다가는 무슨 험한 일을 당할지 모르는 긴박한 순간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듯 했다. 그래서 심산은 일단 돈암동 김기남의 집으로 피신하게 된다. 일제의 고문으로 지체가 부자유스러운 심산을 김기남의 차남 김대현(중4, 지금의 고1)이 손수레로 모시고 왔다. 아녀자와 어린사람들은 제외하고 그들은 눈에 띄는 대로 강제로 의용군에 끌고 가는 바람에 비교적 어린 김대현이 나서서 모시게 된 것이다. 피신 중에 부족한 양식을 조달하는 것도 김대현의 몫이었다. 돈이 될 만한 물건이면 패물이고 옷가지며 가릴 것 없이 싸들고 경기도 일원 시골을 누비며 양식을 구해야만 하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다급한 마음에 피신은 했으나 심산 선생은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이다. 본가 여덟 식구(김기남 내외와 슬하에 5남1녀, 당시 장녀는 출가함)에 심산 내외분을 합해 모두 열 식구의 식량문제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날 김기남의 집에서 72회 생일을 맞은 심산은, 생일 아침 감회가 있어 시를 읊어 김기남에게 전했다.
공비의 흉봉(凶鋒)을 피하여 김기남 집에 은신하며
나의 인생 72년 간
험한 지경을 그 몇 번이나 지나왔던고
서양 사람들
국명(國命)을 조정함을 참아 말하랴만
어리석은 백성들
공을 세우려 함이 정말 가련하구나
아내는 고생을 쌓았지만
가난한 것이 무슨 병이리
부모를 모시지 못한 남은 슬픔으로
눈물이 마르지 않네
은근한 동도(東道)의 주인에게 무척 감사하고
기꺼이 닭고기와 기장밥으로
함께 얼굴을 화하게 해보세
이 시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편찬한 한국사료총서 제18호 심산유고(心山遺稿) 148P에 실려 있다. 심산은 그 와중에도 나라 걱정, 아내 걱정에다 부모를 모시지 못하는 슬픔을 한탄했고, 대가족 부양도 벅찬데 내외분의 합류가 무척이나 미안한 소회를 적었다.
심산은 피신생활 중에도 늘 긴장의 연속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김기남의 앞집에는 남로당 당원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의 감시를 항시 받아야만 했다. 남로당원들이 불쑥불쑥 들이닥쳐 의용군 징집 대상자를 찾느라 집을 뒤지는 일이 잦아 하루에도 몇 번씩 다락방에 몸을 숨겨야만 했다. 징집 대상자 뿐만 아니라 그들이 혈안이 되어 찾고 있는 심산을 숨겨주다 발각되는 날엔 정말 큰일이다.
당시의 살벌한 분위기로 봐서 가문의 멸문을 각오하지 않고는 도저히 할 수없는 위험한 일임이 분명하다. 김기남도 그런 위험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오직 심산 선생의 납북만은 막아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납북은 곧 죽음이기 때문이다.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불안감 때문에 이곳에서도 오래 머물 수가 없게 되어 할 수없이 피
난처를 옮기기로 했다. 같은 돈암동이지만 좀 떨어진 곳에 김기남의 사위(이기복, 성주 초전면 자양동 출신)가 살고 있었다. 김대현의 매형이다. 그때도 김대현이 작은 체구지만 밤중에 거동이 불편한 심산을 업고 매형집으로 피신하게 된 것이다. 납북만은 막아야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이기에 잠시도 방심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공비의 화를 피해 이기복의 집에 숨어 지낸지 40여일이 지난 어느 날, 심산은 당시의 심경을 한탄한 장문의 시를 남겼다.(심산유고 58P 한시 참조)
조국 독립을 위해 일제에 맨몸으로 저항하다가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두 아들을 나라에 바쳐 가정은 풍비박산이 되었음을 한탄하면서 쓴 심산의 당시 흉중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김기남이 심산 선생과 연을 맺게 된 사연은 이렇다. 김기남의 본관은 경주인으로 성주가 고향이다. 성주읍 대황동에서 살았었고, 심산의 차남 찬기(부인 손응교, 월성인 96) 씨와는 절친한 친구 사이다. 찬기 씨가 아버지 심산의 부름으로 독립운동에 깊숙이 가담하며 중국을 드나들면서 때때로 귀국할 때 김기남의 집이 찬기 씨의 은신처가 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찬기 씨 출국 때는 여비마련은 물론이고, 아마도 소정의 독립자금도 주었음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당시에 그러한 사실이 노출되는 날엔 두 가정의 멸문은 불을 보듯 뻔한 사실이라 극비리에 진행했을 것이다. 당시의 김기남의 생활 형편은 벼 몇 백석을 하는 부농에 속했다.
찬기 씨와의 친분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심산에게 접근이 잦았으며, 그후 8.15해방 다음날 김기남이 전국유림대표인 심산을 모시고 상경, 성균관대학 설립에 동참하게 된다. 심산 김창숙 선생이 학장을 맡고, 후원회장에는 백범 김구 주석을 추대했다. 김기남은 성균관대학 사무국장과 재단상무이사로 다년 간 봉직하면서 심산 을 최측근에서 보필했다.
김구 선생이 돌아가신 그해 정초 김기남이 백범에게 세배를 갔었다. 백범은 김기남에게 "심산 선생을 잘 보필해줘서 고맙다"며 덕담을 건넨 다음 "앞으로 학교 발전과 재단업무에도 최선을 다해주기를 바란다"고 간곡히 당부했다. 그리고 백범은 이승만 박사의 단독정부 수립만은 막아야 하는 시대적인 고민을 토로하는 내용으로 김기남에게 친필 휘호(存念文, 마음에 새겨두는 글) 한 점을 써주었다. 지금 그 휘호는 김대현이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필자는, 가정보다 국가가 먼저라는 심산 선생의 철학을 후세인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 같은 것을 느끼곤 했다. 그래서 `심산 재조명`이라는 언론 연재를 위해 자료를 수집하던 중 국사편찬위원회가 편찬한 `심산유고`에서 심산의 `6.25동란 중의 행적`을 발견했다. 당시 중학교 4학년(지금의 고1) 학생으로서 온갖 심부름을 도맡았으며, 심산을 손수레로, 또는 업고, 집으로 그리고 매형집으로 직접 모셨던 김대현(경기 광명시 거주, 79, 장남은 인기개그맨 김한국이다) 선생에게 당시의 긴박했던 생생한 순간들을 듣고 이 글을 쓰게 되었음을 밝힌다(김기남 선생의 장남 김호현(86) 씨는 현재 서울 거주).
한 집안의 가장으로 김기남 선생은 당시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그리고 멸문의 위험을 무릅쓰고 아들, 딸 그리고 사위까지 온 집안 식구들이 합심하여 심산 선생을 위험에서 구했던 한편의 드라마 같은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