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3학년 시절에 나는 잠시 신문배달을 한 일이 있다. 여러 달 동안 많은 분들에게 부탁을 드려 겨우 얻어낸 소위 아르바이트였다. 그때 내 키는 150cm도 채 못 되었다. 초전면 소재지에 거주하는 동네 유지들과 면사무소를 비롯한 행정기관과 몇몇 상점들을 대상으로 신문을 배달하는 이른바 신문 배달 소년이 된 것이다. 대구에서 발행되는 Y일보를 김천행 버스 편으로 전달받아서 배달을 한다. 30여 부 남짓한 신문을 배달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불과 1시간 정도.
이 신문을 돌리는 육체적 노동이 결코 고달픈 것은 아니었다. 월말이 되어 그달의 신문대를 걷는 일을 제외하고는…. 요즈음처럼 지로용지로 구독료를 징수하였더라면 편했을 터인데. 신문 구독자 가운데 어떤 이는 오죽 답답하면 저놈이 신문배달을 다 하겠냐? 또 어떤 이는 그놈이 집에서 학비와 용돈을 제대로 받지 못하니 저 고생을 하나보다 하시면서 신문대금을 제때에 잘 주시곤 하였다. 그런데 어떤 분은 그렇지를 않고 내일 저녁에 보자, 다음 달 초에 보자 하면서 애를 먹인다. 그중에서도 아주 끈질긴 분으로서 기억에 남는 분은 그때 대서방을 하시면서 도장가게를 하시던 S씨였다. 신문 값을 몇 달치씩 밀리게 하는 그야말로 여수에는 끈질긴 분이었다. 1년 반 가량의 세월이 지나고 내가 신문배달을 그만두게 될 무렵에 그 어른은 자그마치 6개월분의 신문 값을 미납한 상태였다. 요사이는 어떻게 하는지 모르지만 그 당시 신문배달부에게 돌아오는 보수란 10부에 한 부씩 따라오는 무가지가 고작이었다. 그런데 이 지독한 S어른처럼 신문대를 제때에 안주면 요사이 돈으로 매달 몇만 원의 보수밖에 못 받는 신문배달 소년은 허전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일이다. 그 어른한테서 신문 값을 다 받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한 나머지 내가 꾀를 내었다.
어느 날 그 어른을 찾아가서 보기 좋은 뿔 도장 한 개를 골라서 한자로 내 이름 석 자를 각인해 달라고 했다. 그 도장 값은 뿔 값과 파는 수고료를 합해서 밀린 신문 값보다는 약간 더 비싸다는 것을 미리 알고서 그렇게 한 것이다. 도장을 찾던 날 나도 그 뿔도장 값을 외상으로 달고 나왔다. 내가 신문배달을 그만두고 얼마가 지난 뒤 그 어른께서 지나가던 나에게 뿔도장 값을 달라고 하셨다. 밀린 신문 값을 제하고 더 드려야 하는 돈만 드리고 말았다. 그 어른께서 하시는 말씀이 "나는 일 년에 이런 도장을 몇 개밖에 못 파는데, 자네 너무 심한 것 아니냐?" 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나의 대답은 간단하였다. 어르신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한 것뿐이라고…. 현금 돌아가는 사정은 다른 어른보다 좋은 편이었는데도 그의 마음이 너무 가난한 나머지 나 같은 신문배달을 하는 소년을 그렇게 괴롭혔는지 모른다.
내가 신문배달을 내 후배 L군에게 인계할 때 그 대서방에는 신문을 넣지 말라고 일러 주었다. 어쨌든 나는 그 덕택에 참 예쁘고 잘 파여진 뿔도장 하나를 어린 시절 신문배달 기념품으로 지금도 잘 간직하고 있다.
세월이 많이 간 다음에도 나는 이 뿔도장이 마음에 들어 대만이나 중국을 여행하게 되면 가족들이나 친지들에게 상아 뿔 도장을 늘 선물로 파다 주곤 했다. 아마도 지금까지 이런 뿔 도장 선물을 스무 개는 넘게 한 것 같다. 또 한 가지 나에게 남겨진 생활습성 중의 하나는 모든 줄 돈은 제때에 지불하는 버릇이다. 돈 받을 사람의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 말이다.
내가 미국 유학을 마치고 고향을 방문해 보니 그 대서방이 사라지고 없었다. 안부를 물었더니 그 S씨가 생각보다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결국에는 세상을 떠나고 말건데 살아생전에 마음보나 곱게 쓸 일이지. 그러나 열심히 살았던 그분의 명복을 빌고자 한다
(2006. 11.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