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용운은 "나는 심산의 마음을 알고 있다. 심산의 얼굴은 몰라도 좋다"라는 글을 보내오기도 했다. 심산은 이때까지 이 세 사람 가운데 어느 누구와도 대면한 적이 없었다. 만날 형편이 못됐지만 굳이 만나보아야 할 일도 아니었다. 그 정신을 알기 때문에 곧 동지가 되는, 세속적인 관계를 뛰어넘는 격 높은 교우였다. 바로 마음으로의 사귐이라 하겠다. 1940년 일제의 감시가 다소 완화됐다. 마침내 고향집을 찾아 어머님의 묘막으로 가서 2년간 시묘를 했다. 어머님 돌아가신지 실로 20년만의 일이다. 망명지 상해에서 모친의 별세 소식을 듣고도 돌아와 시묘를 할 수 없었던 아들의 마음과 그동안의 경과를 어머님묘 앞에서 고하고 심정을 다 쏟았다. 1943년 심산은 차남 찬기를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로 보내기도 했다. 차남이 혁명사상을 품어 여러 번 투옥되었기에, 망명을 시켜 일본 경찰의 미행과 감시를 피해서 활동하게 한 것이다. 몸은 불구가 됐어도 정신은 대쪽같이 곧고 강했던 심산은 태평양전쟁 중에 지하조직인 건국동맹에 다시 남한 책임자로 참여했다. 건국동맹은 44년 8월에 서울에서 여운형을 중앙책으로 조직된 것으로, 불언(不言)·불문(不文)·불명(不名)의 3대 철칙 아래 민족적 양심이 살아있는 인사를 망라하여 공장·회사·학교·대중단체에 세포조직을 확대시켜 가면서 일제의 패망과 민족의 해방에 대비하고 있었다. 심산은 비록 실질적인 활동은 할 수 없었지만 당시 이 나라 전체를 통하여 민족적 양심의 대표적 존재로서 그의 참여는 그것 자체만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1945년 8월 초, 건국동맹 결성의 사실이 노출되어 일경에 체포됐다. 왜관으로 이송, 수감되 어 있던 중 드디어 해방의 소식을 듣게 된다. 해방 후 통일운동과 반독재 투쟁 □통일정부 수립운동 조국이 광복되자 심산은 무엇보다도 민족의 분열을 경계했다. 반드시 우리의 손과 힘으로 통일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굳게 주장했다. 그래서 민족과 국토의 분열을 조장하는 일체의 이기적인 정당활동이나 외부세력의 영입을 단호히 배격했다. 따라서 우후죽순처럼 난립하는 60여 정치단체를 마땅치 않게 보았고, 그와 잘 아는 이들이 조직한 민중당의 당수 추대도 거절했다. 하나의 민족이 분열, 대립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심산에게는 대의명분에 속한 지상의 원칙이며 도덕률이었다. 여기에는 어떤 조그만 또 어떤 다른 방편도 있을 수 없다. 처음부터 비정치적인 것이었다. 심산은 난립하는 어떤 정파에도 참여하지 않는 한편, 기선을 잡고자 발빠르게 나서는 인민공화국 선포에도 반대하면서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뭉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신탁통치의 찬반문제, 미소공동위원회 참가문제 등에서 좌익은 물론 이승만을 비롯한 우익 인사들과도 뜻이 맞지 않아 항상 소수파의 고립적 입장을 면할 수 없었다. 해방 이듬해에 심산은 정부수립을 위한 28인의 최고정무위원에 뽑혔으나 이 기구가 미군정 사령관 하지의 자문기관인 민주위원으로 전락하자 이승만과 대립하여 곧 탈퇴했다. 심산은 민족의 분열과 분단의 조짐을 외면할 수 없어 김구·김규식·홍명희·조소앙·조성환·조완구 등과 함께 이른바 `7거두공동성명`을 발표하여 남한만의 단독 정부수립에 극력 반대 했다. 그러나 이러한 명분과 대의를 앞세우는 외로운 투쟁은 권력욕에 휩싸인 외세 결탁 세력에 의해 번번이 좌절됐다. 결국 한반도에 두 개의 정부가 세워짐으로써 조국은 남과 북으로 갈리었다. 심산은 비통과 격분 속에 두 정권의 수뇌를 향한 신랄한 비판과 미·소양군의 철수를 詩와 성명 등을 통해 극력 주창했다. 심산의 의롭고 예리한 필설 앞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심산은 언제나 분열을 꾀하는 자들을 민족반역자로 단죄하여 강력히 비판했으며 또한 이들과 타협하지 않고 끈질긴 저항으로 맞섰던 것이다. 4·19혁명 후 노병객 심산이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의장직을 맡았던 일도 통일운동을 위한 그의 마지막 봉사이며 염원의 실천이었다. □반독재 투쟁 `남한단독총선 반대` 등 끊임없는 반분단 투쟁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조국은 분단되고 이승만의 독재는 도를 더해갔다. 김구를 비롯한 많은 지도적 인사들이 암살되는 정치의 혼란을 거치면서 친일파가 다시 정권과 유착하여 실세가 된 마당에 심산은 이제 이승만 정권의 부패와 독재에 단신으로 정면 투쟁했다. 이승만 대통령 하야경고문, 부산피난지에서의 국제구락부 사건 주동, 이승만 3선 취임 반대, 보안법 개악 반대, 민권쟁취 구국운동 등 독재와 맞서는 외로운 싸움으로 그는 항상 탄압과 옥고를 반복했다. 심산은 1956년 부정한 선거로 3선 취임한 이승만에게 "이제 전국의 민심은 이미 떠났다. 금번 부정선거는 무효로 선언하고 전국적 재선거를 특명 실행함이 대통령의 가장 급무이며, 이것이 민심회복의 유일무이한 방법이다"라고 정면으로 비판했다. 이에 자유당 정권은 관권과 폭력을 동원하여 성균관, 유도회를 점령하고 심산을 일체의 공직에서 추방했다. 그리하여 심산은 병든 몸을 이끌고 고향 성주로 돌아갔다.
최종편집:2025-05-22 오후 05:4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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