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초등학교를 마칠 무렵에는 의형제를 맺는 것이 하나의 유행이었다. 자기 형제가 몇 명씩 있는 사람들도 의기가 투합하면 친한 선후배 사이에 의형제를 맺곤 했다. 정확히 기억할 수 없지만 해방 직후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이다. 내 1년 선배인 S형과 동급생이면서도 나이가 한 살 많아 진짜 형 같았던 김수호 형과 셋이서 우리는 의형제를 맺었다. 물론 S형이 맏형이고 나는 막내였다. 세 사람은 바늘에 먹물을 묻힌 실로 팔목에 검은 무늬를 새기는 의식까지 치렀다. 이것은 평생 지울 수 없는 결의형제의 의식이었다.
그 후 6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맏형을 자처하던 그 S형은 만나서 형제의 정을 나눈 기억이 별로 없다. 그러나 김수호 형은 그렇지 않다. 그 후 오랜 세월동안 정말 형제처럼 친구처럼 다정하게 지났다. 그의 가정은 시골에서는 상당히 부유한 편이고 가정형편이나 가족관계도 모든 사람이 다 부러워하는 처지였다. 김수호 형의 아버님은 한약방을 운영하고 계셨는데 환자들의 병을 잘 고쳐주어 가히 명의라는 소문이 났을 정도였다. 그러니 그가 대구에 가서 경북중고등학교를 다니고 경북대학교 법과대학을 다니는 일은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우리 고향 어르신들께서는 자녀를 서울로 유학을 보내는 일을 크게 꺼렸기 때문에 그가 서울로 가서 공부를 못했을 뿐 재주가 아주 뛰어난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방학 때 그가 고향에 돌아오면 내가 김수호 형 집에 가든지 그가 우리 집에 놀러 오든지 하여 숱한 내왕이 있었음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생두부와 막걸리를 나누면서 우리는 내일의 인생을 얘기하고 가난하고 불우한 농촌 농민문제를 얘기하는 일로 밤을 지새우기도 하였다. 그래서였는지 모르지만 그는 법과대학을 졸업하였으나 판검사를 마다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지으면서 새마을운동과 농촌재건운동에 앞장을 섰다. 물려받은 농토에 과수원을 일구고 채마밭에는 파 등 원예작물을 재배하는 것을 내 눈으로 목격할 수가 있었다. 그때 논밭농사 외에 돼지를 몇 마리만 잘 키워도 생활비는 얻어낼 수 있었으니까 해볼 만한 일이었다.
천 년 묵은 농민의 가난을 떨치고 백 년 묵은 농민의 식량 걱정을 해결하려는 그의 새마을 운동 얘기는 신화처럼 사람들의 입과 입을 통하여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 그때 시골에서는 김수호를 모르면 간첩이라고 할 정도였으니까. 우리는 대학을 다닐 때나 그 뒤에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비교적 자주 만났던 것으로 기억된다.
내가 미국유학을 다녀온 1960년 중반 어느 겨울에 우리는 다시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때 그의 고민은 이러하였다. 성주 군내는 물론이고 경상북도 내 각 군과 심지어 전국으로부터 자기와 자기농장을 방문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져서 개인적인 자유가 없고 심지어는 농사짓는 일에까지 지장이 가고 있어 큰일이라는 것이다. 결국 김수호 형은 새마을 운동의 기수로서, 농촌재건운동의 선구자로서의 유명세를 단단히 치르고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나는 지난날 고향을 그리 자주 방문하는 편이 못되었다. 후회스러운 일이나 교수생활에 집중하다 보니 생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내가 고향을 방문하게 되면 거의 예외 없이 김수호 형을 만나서 정담을 나누고 회포를 풀곤 했다. 세월이 가도 변화 없는 그의 인정과 따뜻하고 포근한 마음은 언제나 나를 사로잡는다. 작년에는 마침 나의 학문생활 50주년을 기념하는 자전적 수필집과 교수연구 회고록을 발간하였다. 이 두 권의 책을 시골에 있는 초등학교 동기생들에게 나누어주고 싶었다. 이 일을 김수호 형과 의논하였더니 자기에게 박스로 10질을 보내 주면 일일이 친구들 집을 찾아다니면서 배달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마음씨와 인간성의 소유자가 아닌가 싶다. 형수씨도 대구에서 대학을 같이 졸업하고 남편을 따라 시골에서 생활을 하고 있는 분이다. 남편 뒷바라지를 잘하는 것은 물론 자녀를 훌륭하게 양육함으로써 정말 문자 그대로 현모양처다.
세 사람이 어릴 때 의형제를 맺었으나 한 사람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면서 여생을 보내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데, 다른 한사람은 평생 동안 정말 친형제처럼 지나고 있으니 두 사람의 모습이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앞으로도 김수호 형과는 서울이나 고향에서 더 자주 만나게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가 더욱 건강하게 여생을 보내기를 기원하는 바이다(2007. 3.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