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도재건 개혁운동 심산은 민족주의자요, 기본적으로 유학자이다. 그의 민족주의는 유학의 대의명분론에 깊이 뿌리박은 것으로 그 불굴의 선비정신은 곧 유학의 대의실천의 자세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이를 실천한 심산의 생애 가운데서도 해방을 전후로 그의 사상·정신의 변화를 볼 수 있으니, 하나는 파괴와 부정을 주도하는 반대와 투쟁의 시간이요, 하나는 화합과 질서를 주창하는 윤리와 도덕의 시간이다. 전자가 식민지 시기의 정신이요, 후자가 독립국가의 새로운 사회건설기의 사상임은 물론이다. `화합과 질서를 통한 윤리와 도덕의 구현`을 위해 정치 현실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오직 유교의 근대화와 교육사업에 심혈을 기울이게 됐다. 심산은 일찍이 "성인의 글을 읽으면서 성인이 시대를 구하고자 한 뜻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면 이는 위유(僞儒, 거짓선비)이다"라고 했다. 참다운 선비는 의리의 실천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심산의 시의정신은 유학의 `시중지도(時中之道)에 근거하는 사상이다. 1946년 난립한 유도회조직을 정비하여 유도회총본부로 출발할 때 심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인은 공자를 `꽁쯔`라 하나 우리는 `공자`라 한다. 귀한 것은 공자의 성명보다 공자의 심법이다. 이것이 즉 인류를 지배할 시중의 대도다. 잡으면 있고 놓으면 없어지며 행하면 흥하고 반하면 망한다. 우리는 임란·병란과 같은 국치를 당하여서도 하등의 각성이 없었고 시대에 낙후된 껍데기만 고수하다가 경술국치와 같은 대통한사를 유치했다. 그러면 우리로 하여금 이와 같은 죄과에 함입케 한 것은 무엇인가. ①대도의 실질을 파악치 못하고 허문의 형식에만 포니(抱泥) 했던 점 ②사대사상은 의뢰심을 증장하여 자립의 정신이 소침했던 점 ③문약에 젖은 타성이 실행의 용기를 결핍케 한 점 ④습속에 고체하여 대국을 규찰치 못하고 맹목적 자존심이 강하여 원만히 단결치 못한 점. 그러므로 우리는 명목장담 백퍼센트의 정력을 기동하여 무용한 형식을 정리하고 사대사상을 청산하고 용기를 분발하고 단합을 견고케 하여 시중의 소재를 정확히 파악하여 재기를 도모치 않으면 안된다.(유도회 총본부 위원장 취임사 중에서) 이 글에서 심산이 강조하는 것은 유교의 폐단을 청산하는 것이었다. 헛된 형식과 사대사상, 나약한 타성과 인습적 자존심으로 인한 분열을 과감히 청산하고, 실질을 파악하고 자립정신을 배양하며 용기를 분발하고 단합을 견고케 함으로서 재기를 도모하자는 것이다. 요컨대 유도의 재산과 개혁운동이었다. 심산이 유도 재건운동에 나섰던 것은 해방 후 열강에 의한 국토 분단과 이와 결부된 좌우대립의 시대적 혼란을 극복하고 민족의 통일과 단합을 추구하기 위해서였다. 심산은 과거 한국사회의 가장 강력한 이념이었던 유도의 현대적 재건이 이러한 목표를 이루기 위한 중요한 매개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심산의 유도재건운동은 순탄치 않았다. 일제 때 경학원을 무대로 친일 활동을 벌였던 소위 황도유림 세력과 지방향교를 중심으로 한 보수유림의 반대가 격렬했던 때문이다. 이들 부패한 유림세력은 1950년대 중반 자유당 독재정권과 손잡고 심산을 추방하는데 앞장서게 되니 심산이 추진해 온 유도 개혁도 결국 지속되지 못하고 만다. □성균관대학의 설립 심산의 교육운동은 민족운동의 일환으로서 부단히 추구되는 지향적 목표였다. 애국계몽기 고향에서 펼친 성명학교와 중국 망명시기의 교육사업이 그러했다. 민족의 맥박이 쇠잔해가는 마당에 학교를 설립하여 도의와 신사상을 진작하고 강상을 부식함으로서 겨레의 정기를 다시 불러일으키겠다는 목표가 심산의 교육운동의 정신이었다. 성균관대학의 설립은 이러한 그의 교육이념과 실천행동의 최대 결실점이었다. 1946년 9월 25일에 성균관대학의 설립인가를 받게 되고 그와 함께 심산은 초대 학장으로 취임했다. 그리하여 심산은 과거 민족의 대학인 성균관과 유교문화의 전통을 계승한 성균관대학의 지도자가 됐던 것이다. 심산의 평소 기질과 비타협적 행동 특성으로 볼 때 미군정 하에서 대학을 세우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평소 심산의 뜻에 공감했던 많은 인사들의 도움으로 성균관대학이 개교하게 된다. 실제 처음으로 문교부장 유억겸과 차장 오천석 등을 만난 곳은 금화장이었다. "일본기가 꽂혔던 자리에 미국기가 펄럭이는 중앙청에는 들어가고 싶지 않다"고 하며 장차관들을 불러내어 만난 것이다. 물론 유억겸은 심산을 존경하고 그의 뜻을 헤아려 적극 협력하고 주선했다. 그렇다고 심산이 폐쇄적이거나 완고한 전통의식에 고착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심산의 교육정신은 오히려 개방적이며 현실적이었다. 성균관대학 창립식에서 심산은 성균관대학의 특색을 "우리민족의 전통적 윤리도덕의 진수를 천명하여 우리의 문화를 세계만방에 선양하려는 바"라 했다. 그리고 "동서고금의 가장 좋은 점을 절충하여 우리의 고유한 유교정신에 귀납, 함양시키자"고 했다. 남의 장점을 받아들여 자아화 함으로써 그 진수를 만들고 이러한 자기 문화를 세계에 선양하는 일, 이것이 곧 자기발전의 길이라고 본 것이다. □84세로 생애를 마감 1955년 무렵부터 독재 권력과 그 주구들에 의해 소위 성균관 및 성균관대학의 분규가 확산되어 심산은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고 만다. 1960년 4·19혁명 직후 성균관에서는 심산을 다시 모셔오자고 했지만 이미 기력이 쇠퇴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대표에 추대되기도 했으나 5·16 정변으로 그마저 무산됐다. 성균관대학에서 물러난 심산은 서울에서 집 한 칸도 없이 곤궁한 생활 속에 여관과 병원을 전전 하는 형편에 처하게 됐다. 심산의 선비정신과 청렴결백한 태도가, 대학을 세우고 학장·총장을 지내고서도 셋집에서 여생을 보내게 만들었던 것이다. 투철한 선비정신의 소유자요, 불요불굴하는 위대한 저항자세와 과감한 행동주의의 표상이었던 심산이 드디어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이다.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면서 전통적 원칙을 지켜나갈 때 비로소 대의명분이 세워지는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마음(心)`에 의한 행동주의, 그리고 시대적 의리에 의한 대의명분으로 무장된 심산의 사고(思考)는 그의 생애를 일관한 백절불굴 정신의 원천이었다. 후세 사람들은 그를 대의명분의 화신, 항일투쟁의 거성, 조국독립운동과 반공·반독재투쟁을 펼친 애국자, 충의지사, 민족정신과 실천하는 지성의 마지막 선비이자 유학자, 민족주의자, 민족교육에 앞장선 교육자, 영원한 투사 등 많은 수식어가 그의 이름 뒤에 따른다. 심산 김창숙 선생은 우리 근대사에 있어서 `진보적 유학 정신과 민족주의를 일치시킨` 보기 드문 완인(完人)의 형상으로서 길이 민족의 사표가 될 것이다.
최종편집:2025-07-08 오후 04:59:04
최신뉴스
트위터페이스북밴드카카오톡네이버블로그URL복사
이름 비밀번호
개인정보 유출, 권리침해, 욕설 및 특정지역 정치적 견해를 비하하는 내용을 게시할 경우 이용약관 및 관련 법률에 의해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유튜브페이스북포스트인스타제보
PDF 지면보기
오늘 주간 월간
출향인소식
제호 : 성주신문주소 : 경북 성주군 성주읍 성주읍3길 15 사업자등록번호 : 510-81-11658 등록(발행)일자 : 2002년 1월 4일
청소년보호책임자 : 최성고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 경북 다-01245 개인정보관리책임자 : 최성고e-mail : sjnews1@naver.com
Tel : 054-933-5675 팩스 : 054-933-3161
Copyright 성주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