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부아지에는 1743년 프랑스 파리의 변호사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그의 나이 5살 되던 해 어머니가 병으로 죽자, 두 누나와 함께 그의 이모집에서 자라게 되었다.
그는 법학을 공부해 변호사가 되었지만 천문학 강의를 들은 뒤부터는 자연 과학에 더 큰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어머니의 유산과 아버지의 도움으로 25살 때 세금관리인 조합 회사인 페르메의 간부가 되었다.
페르메는 세금을 걷기 위해 만들어진 폭력 조직이었는데, 이들은 국가를 대신해 세금을 걷었는데 국가로부터 지시 받은 세금의 3,4배를 징수해 납부하고 나머지는 수수료로 횡령하기도 했다. 이처럼 가혹한 징수로 막대한 수입을 올렸고, 그로 인해 그는 큰 부를 갖게 되었다.
그의 수입은 실험실 실치 및 실험 도구나 약품 구입으로 쓰여졌으며, 그의 실험실은 최신 실험 설비를 갖춘 큰 실험실로 유럽이나 미국의 저명한 과학자들도 자주 방문했다. 라부아지에는 평생 매일 6시간 동안 화학 실험을 했다. 그리고 1주일 중 하루는 하루 종일 화학 실험을 했다.
라부아지에는 큰 재력을 배경으로 훌륭한 실험실과 실험 기구, 그리고 뛰어난 머리를 가졌기 때문에 발견 속도가 매우 빨랐다. 어느 누구도 그의 연구 결과를 쫓아갈 수 없을 정도로 탁월하였다. 그의 뛰어난 재능에 경쟁자가 있을 수 없어서, 그는 늘 고독한 화학자로 지냈다.
그러다 라부아지에의 나이 28살 되던 해에 그는 동료의 딸인 14살 마리 안 폴즈와 결혼을 했다. 그녀는 남편을 돕기 위해 라틴어, 영어, 화학, 그림 공부도 했다. 마리는 재치 있고 능력있는 아내로 라부아지에의 연구를 도와준 뛰어난 공동 연구자였으며, 그림을 잘 그렸던 그녀는 라부아지에의 실험을 이해하고 재현할 수 있을 정도로 사실감 있는 그림을 그려 라부아지에는 1789년 물리학 분야에서 뉴턴의 에 견줄 만한 역사적인 화학 교과서인 을 출간했다.
1783년 라부아지에는 그때까지의 실험 결과를 종합해 화학 반응 전후에 있어서 반응 전 물질의 총질량과 생성물의 총질량은 변함이 없다는 ‘질량보존의 법칙’을 발표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발생하면서 인생 최악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세금관리조합에 참여한 이유로 국가혁명위원회에 체포되어 1794년 사형 판결을 받고 단두대형이 집행되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었다. 당시 사형 집행을 목격했던 라그랑주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그의 목을 자르는 데는 1초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그의 목을 만들려면 100년이 걸릴 것이다.’ 아마 그가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오늘날 ‘돌턴의 원자설’로 유명한 원자설은 ‘라부아지에의 원자설’로 불려졌을지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