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미술계의 공모전에 얽힌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지금은 세월이 흘러 미술계도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그 중 눈에 띄게 달라진 풍속도랄까, 대한민국미술대전을 비롯한 각종 공모전의 흐름과 변화일 것이다.
이삼십 년 전만 해도 작가로 등단할 수 있는 공모전이 문화공보부와 문예진흥원을 거쳐서 현재까지 미술협회에서 주관하는 국전이라는 대한민국미술대전과 민전(民展)으로는 동아미술대전, 중앙미술대전, MBC미술대전 등 언론사에서 주관하는 비교적 권위를 인정받던 공모전이 있었는데 지금은 다 없어진 상태다. 그 외에 민간단체에서의 얼마 안 되는 숫자의 공모전이 손에 꼽을 정도였지만 지금은 수백 개의 단체가 난립되어 운영하다 보니 많은 문제점도 안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모든 단체가 대한민국이라는 타이틀을 앞에 붙이다 보니 다 비슷비슷한 그런 단체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도 예나 지금이나 미협에서 주관하는 대한민국미술대전이 최고의 권위와 위상을 가지고 있기에 지금까지 매년 미술계의 가장 큰 행사로 치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언론에서 부정적으로 보도가 되면서 여론의 뭇매도 맞고 시대적상황이 많이 변하기도 해서 출품수도 줄고 사람들의 관심도도 다소 떨어지고 화가를 보는 일반인들의 시선이 지금은 그전같이 곱지만은 않은 현실이어서 현 미협 집행부와 미술인들이 풀어야 할 숙제가 많은 것 같다. 미술계 일부에서 일어난 작은 일이 매스컴을 타면서 과장되고 침소봉대된 부분이 없지 않은데 정상으로 되돌리는 데는 엄청난 대가를 치루어야 하는 것이다.
그때는 한국미술협회가 주관하는 미술대전이 대략 구시월 경에 개최되었는데 화가들은 한 해 동안 정말 열심히 작업을 해서 정성껏 액자를 만들고 공을 들여 출품을 했다. 지금은 봄가을로 구상, 비구상으로 나뉘어 두 번씩 치루어져서 기회가 많은 편이지만 그때는 일 년에 한 번밖에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출품 수만 해도 한국화만 천여 점이 넘을 정도였고 서양화나 다른 분야까지 하면 수 천 점의 작품이 전국에서 입상의 꿈을 안고 과천으로, 과천으로 몰려오는 것이다. 각 지방의 작품을 모아서 실어온 트럭들이 수십 미터까지 늘어서서 그림을 내리는 장면은 정말 장관이었고 지금은 찾아 볼 수가 없는 진풍경이기도 했다. 칠십 년대 말까지만 해도 덕수궁에서 행사를 치루었는데 장소가 좁다보니 작품크기도 80호까지였고 뽑는 숫자도 제한되었는데 현재의 과천국립현대미술관으로 옮기고부터는 100호로 커졌고 입상자 숫자도 조금 늘어나기는 했지만 여전히 입상하기는 바늘구멍 이었다.
나도 그 시절 참 열심히 출품을 하였는데 십여 년 만에 입선을 하였다. 십년동안 계속 떨어진 사람은 많은 편이고 어떤 작가는 이십년 만에 입선하기도 했고 아예 떨어지기만 한 사람도 많았다. 지금은 작품운송하는 회사도 생겼고 전문적으로 미술품을 운송하는 개인사업자도 많지만 그때는 용달차를 주로 이용하였다. 그러다보니 단골기사가 있었는데 해마다 중량교에서 동료작가 작품하나 싣고 왕십리에서 또 한점, 그리고 내가 있는 잠실에서 합류해서 작품을 싣고 과천까지 가면 그곳에는 마치 축제인양 전국의 화가들이 다 모여서 오랜만에 만나 서로 회포도 풀고 그해의 작품성향이나 수준도 파악하고 또 본인의 작품과 비교도 해보면서 당락을 점치기도 하는 것이다.
저녁에는 모여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서로 열변을 토하다 돌아오면 발표가 나기까지 며칠을 초조하게 기다리며 애를 태웠던 그 시절이야말로 참으로 순수했고 그 기억들이 지금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며칠 후 신문에 발표가 나기 전 미술관으로 전화를 해서 확인하기도 했는데 그해(93년)도 또 떨어졌거니 하고 망설이고 있는 중에 같이 출품했던 동료작가가 내 접수번호를 알아가지고 전화를 한 모양인데 입선을 했다고 연락이 온 것이다. 처음엔 믿어지지가 않아서 장난인줄 알았다. 그러나 허튼소리하는 사람이 아니기에 급한 마음에 허겁지겁 직접 전화를 하였는데 담당자가 입선하셨습니다라고 하는 게 아닌가. 그 말을 듣는 순간 왜 그렇게 눈물이 나던지 혼자서 천정을 쳐다보며 펑펑 울다가 아내에게 알리고 같이 또 울었다.
석간신문이 가판대에 나오는 시간까지를 한참이나 기다렸다가 입선자 명단에 활자로 된 내 이름을 확인하고서야 실감을 하였는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렇게 좋았던 때가 몇 번 없었던 것 같다. 얼마동안을 축하전화 받고 전시장에 가서 걸려있는 내 그림을 바라보면서 성취감을 느끼며 마치 구름위에 떠있는 기분으로 취해 있었던 것 같다.
그 뒤 특선도 하고 심사위원으로 위촉되기도 했지만 그 기쁨의 강도가 첫 입선 때의 감격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으니 사람의 감정이라는 게 참 묘한 것 같다. 그 후 4년인가 지나서 두 번째 입선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입선을 할 때 마다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첫 번째 경우는 출품 전날 방에서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데 갑자기 경찰들이 신발을 신은 채로 들이 닥치는 게 아닌가? 나중에 알고 보니 옆집에 강도가 들어 왔는데 우리집 베란다를 통해서 그 집으로 넘어 가려고 한 것이다. 밖에서는 동네사람들이 다 나와서 소리를 지르고 난리가 난 것처럼 소동이 벌어졌는데 옆방에는 아내가 아직 백일도 되지 않은 셋째 딸 은희를 품에 안은 채 떨고 있었다.
다음날 출품을 했는데 그해에 첫 입선을 하더니 두 번째는 안산으로 이사 간 해였는데 그곳에 사는 작가와 함께 작품을 싣고 과천에 도착해서 그림을 묶었던 밧줄을 푸는 순간 화판이 뚝 떨어져버린 것이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서 겨우 붙이기는 했는데 급하게 서두르다보니 그림이 삐딱하게 붙여져 있는데도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상황이라 아이구 올해도 또 떨어졌구나하고 포기를 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운 좋게도 그 해에 입선이 되었는데 전시장에 가서 삐딱하게 걸린 그림을 보면서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첫 입선하던 해는 딸을 낳았고 두 번째 해에는 아들을 보았는데 우연인진 모르지만 하늘이 주신 큰 축복으로 여기며 감사히 생각하고 있다.
또, 두 번 다 그 전해에 낙선한 작품을 다시 출품을 했는데 그 작품이 입선을 한 것도 이상한 징크스였다. 아무튼 그 당시는 떨어지면 다시 기대를 가지고 내고 입선하면 한번 더하려고 또, 특선 하기 위해서 출품하고 그랬다. 입선만 하면 작가로서의 대우도 달라지고 그림값도 올라가기 때문에 기를 쓰고 열심히들 출품하곤 했었는데 그 사람들이 붓을 꺾고 택시운전이나 치킨집을 하거나 직업을 바꾼 경우가 많다. 그중에는 정말 재능이 뛰어난 사람도 있었는데 참 안타까운 일이다.
미술시장(특히 한국화)이 침체의 늪으로 빠지게 되면서 전업작가들이 설 자리를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지금은 출품수가 겨우 몇 백점 정도밖에 안되고 출품하는 작가들의 성향도 한정되어 있지만 그 당시는 미대출신들은 물론 전업작가들도 골고루 출품을 하고 작품내용도 다양하였고 권위 또한 대단했었다. 호남쪽에서는 워낙 예술가를 우대할 줄 아는 곳이기도 하지만 입선만 해도 군수가 인사를 오고 특선을 하면 도지사가 찾아올 정도였으며 큰 현수막을 내걸고 동네잔치를 크게 벌이기도 했었다. 나 자신도 첫 입선을 하고 마침 그때가 추석 무렵이라 고향에 가서 조상과 동네어른들께 인사를 드리고 작은 잔치를 하였고 특선을 했을 때는 군수가 축전을 보내주기도 했었다.
덕수궁에서 미술대전을 치룰 때는 대통령이 직접 개막식에 참석해서 테이프 커팅을 하고 작가들을 격려해주는 장면이 TV9시뉴스에 방영되고 각종언론에서 대대적으로 보도해주지 않았던가. 지금은 현대미술관에서 대관조차 해주지 않아서 해마다 여기저기 장소를 옮겨 다니며 행사를 하다 보니 미술인의 한사람으로 마음이 아프다.
얼마 전 시인의 날에 시인들이 시낭송하는 행사를 공중파TV에서 생중계해주는 장면을 보면서 우리는 미술인의 날에 왜 저런 대접을 받지 못 하는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아쉬워 한 적이 있었다. 이제 우리 미술인들도 스스로 반성할 부분은 반성하고 미술협회 집행부에서는 더 많은 노력을 해서 잃어버린 권위와 위상을 되찾고 화려했던 지난날 미술대전의 부활과 함께 축제의 한마당을 크게 펼치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