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퀴리는 어릴때부터 기억력과 학습능력이 뛰어났고, 당시 러시아의 식민지에 속했던 조국 폴란드의 사랑도 남달랐다.(그녀가 최초로 발견한 방사성 물질의 이름을 식민지 생활로 힘들어하는 폴란드인들에게 희망을 주고자 폴란드의 이름을 따서‘폴로늄’이라고 지었음) 그녀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했는데 이 무렵 아버지가 투자를 잘못해 돈을 모두 잃었기 때문에 그녀는 생계를 위해, 또 의사공부를 하고 있는 언니의 학비를 벌기 위해 가정교사로 일을 해야 했다. 그러면서도 폴란드의 여성 노동자들에게 폴란드어를 가르치면서 민족주의자의 ‘자주강좌’에 비밀리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녀는 최소한의 학비를 마련하자 프랑스 대학교로 유학을 갔다. 마리는 대학 근처에 하숙을 얻어 어려운 유학생활을 했다. 추운 겨울에는 땔감이 없이 이불을 둘러쓰고 공부를 해야 했고, 먹을 것이 없어 영양실조로 쓰러진 것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불굴의 의지를 지닌 마리는 2년 만에 물리학 학사 시험서 수석을 차지했다. 당시 그녀는 돈 많은 남자와 연애를 했는데 남자 집의 반대로 인해 헤어졌다. 후에 마리는 ‘만약에 그 남자와 결혼했다면 라듐은 영원히 발견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 후 그녀는 같이 연구하던 청년 피에르 퀴리(당대 퀴리 온도를 발견하여 최고의 과학자중 한 사람임)만났다. 피에르는 총명하고 예쁜 마리를 보고 한눈에 반했고, 마리 또한 젊은 총각 과학자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마리는 연구 때문에 피에르의 구애에 냉담한 반응을 보였고, 그럴수록 피에르는 마리의 마음을 얻기 위해 수없이 많은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결국 피에르의 열렬한 애정공세로 마음이 열린 마리는 결혼을 허락했다고 한다. 그렇게 이들 부부는 같이 연구를 할 수 있었다. 1903년 그녀는 방사능 발견에 대한 공로로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하지만 불의의 사고로 남편 피에르는 세상을 떠났다. 남편과 하던 연구를 계속하여 그녀는 1911년 두 번째 노벨상을 받았다. 한사람이 두 번이나 노벨상을 받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녀는 과학 연구뿐만 아니라 여성 권리 신장을 위해 노력도 아끼지 않았다. 1934년 마리 퀴리는 병으로 쓰러져 입원했다가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백혈병에 걸린 이유는 오랜 방사능 연구로 인해 그녀가 방사능에 많이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근 40년 동안 방사능에 대해 연구했는데 그 기간동안 받은 방사능의 양은 보통사람들이 평생 동안 받는 양의 약 600억배에 해당할 것으로 과학자들은 추정한다.
최종편집:2025-05-22 오후 05:4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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