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향에 조부님께서 건축하신 근대주택으로서, 건축사적 가치를 꽤 높이 평가받고 있는 주택을 가지고 있다. 왜관을 흐르는 낙동강을 기점으로 한 이정표를 보면 16km라고 표시되어 있으니 아마 직선거리로는 10km 정도 될 것이라 생각된다.
6.25 당시 처참했던 낙동강 전투를 생각해보면, 우리 고향집 주변이 격전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연합군의 공습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고, 나의 고향집은 기관총소사로 인해 지붕기와와 서까래의 피해뿐 아니라 집 기둥에도 탄흔이 여기 저기 있어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다행히 폭격으로 없어지지는 않아서 겉모습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뒤 피해를 입은 부분 부분에는 급한 대로 조부님께서 땜질을 하셨고 조부님께서 돌아가신 후에는 고향을 지키시던 숙부님께서 번와를 하신다던가 해서 모습은 가지고 있었으나 보존을 위한 수리에는 엄청난 금액이 소요될 것이라 엄두를 낼 수 없었다. 거기에 나는 학업을 마치고 5.16과 함께 이른바 산업화를 상징하는 경제개발계획(제1차)의 일선에 몸을 담게 되어 부득이 도시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 고향집을 돌볼 겨를을 갖지 못했다. 그렇게 해서, 허물어져 가는 고향집을 돌보지 못하고 아쉬운 마음과 함께 세월만 흘러 보냈다.
이렇게 마음앓이를 하고 있을 때, 몇 년 전 눈 밝은 건축학자로 부터 근대주택으로서 문화적(건축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이제 부대건물을 제외하고는 보존이 가능하게 복원 수리를 마치고 깨끗한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큰 짐을 벗은 것 같아서 노년을 맞은 우리 내외는 자주 둘러 마음을 쏟고 있다.
이 집이 나에게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가장 큰 바람은 이 집을 건축하신 조부님의 정신을 기리는 것이다.
그 조부님(晩悟堂)의 정신, 말하자면 우리 집 가훈인데 내가 나를 용서하듯 남을 용서하고(恕己之心恕人) 내가 남을 책망하듯 나를 책망하라(責人之心責己) 이를 잘 지켜 고향을 위해 무언가 기여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다음으로는 이집에서 자라난 조부님의 자손들이 산지사방 흩어져서 살다보니 생각마저 제 각각이라 조부님 슬하에서 살던 때 같이 복원된 이집을 중심으로 마음을 한군데 모아 오순도순 정답게 지낼 수 있었으면 하는 소망이 간절하다
가끔 내려가면 새롭게 복원된 이방 저방을 둘러보는데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조부님 계시던 방문을 열어보면 엄하시던 조부님께서 장죽을 입에 무시고 빛바랜 고서를 읽고 계시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 할아버지께서 거처하시던 큰 방에 조그마한 방이 하나 붙어 있었는데 이방 탁자위에는 한 자 남짓 크기의 금동으로 만들어진 입상 관세음보살님이 모셔져 있었고 가끔은 조부님께서 향을 피우시고 마음 닦으시는 모습을 볼 수도 있었다. 또 어릴 적 기억으로는 햇살이 밝은 작은방 하나에서 글씨를 쓰신다던가 현판을 각하시는 모습이 떠오르기도 한다. 지금 생각하면 취미생활이기도 하지만 뛰어난 재주를 가지신 것 같았다.
우리가 공부방으로 쓰던 방을 둘러볼 때는 집안 아저씨가 책방을 하고 계셨기에 그나마도 구할 수 있었던, 사진을 곁들인 얄팍한 책(지금 눈높이로는 얄팍하다고 표현이 되나 당시는 두꺼운 책이었음)인데 도산 선생 연설문을 책상 위에 두고 있던 생각이 난다. 조부님께서, 나의 기억으로는 꼭 한번 우리 방을 둘러보셨는데 이 책을 보셨던 것 같다. 나에게 무슨 말씀이 계셨는데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우리 조부님께서는 신간회(新幹會) 성칠(星州, 漆谷) 지회장을 맡으셨던 어른이셨다.
이 방문을 열어 볼 때 크게 떠오르는 일로는 이웃 형들과 함께 공부했던 기억들인데(그때는 아무나 자식들에게 공부할 수있는 공간을 마련해주기 매우 어려웠던 시대였음) 그 형들의 얼굴과 많은 상념들이 떠올랐다. 그 형들은 6.25때 행방불명이 된 채 돌아오지 못했다.
안채에 들어가면 할머님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큰방이 있고 어머님이 쓰시던 방등, 문을 열어보는 방마다에 어릴 적 기억이 고스란히 떠오르게 된다. 또 훤한 안마당에서는 커다란 평상이 자리하고 있어 여름에는 모깃불을 피워놓고 가족들이 모여앉아 수박 참외 등 여름과일을 광주리 가득 담아 먹던 생각 등 단란했던 대가족의 모습들이 그대로 생생하게 살아난다. 이곳이 나의 고향집이다.
고향집을 떠나 귀경길에 오르면 이제부터는 꿈을 그려본다. 조부님께서 쓰시던 방을 어떤 모습으로 만들어야만 조부님의 유훈을 자손들에게 잘 전할 수 있게 될까로 시작해서 어떤 공간은 지역사회를 위해 어떻게 활용하면 더 값질 수 있을까 등 복원된 공간의 보다 효율적인 활용을 위한 꿈을 그리다보면 어느새 서울에 닿는다. 이른 고향 나들이에 나름대로 큰 기쁨을 느끼고 있다.
나는 요즘 고향집에 내려가서 지낼 마음으로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되는데 물론 건강이 허락하는 동안은 해야 할 일의 계획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때로는 한가롭게 보낼 짜투리 시간이 없지 않을 것이리라.
이제 어릴 적 친구들도 뿔뿔이 헤어지고 그중에는 유명을 달리한 친구들도 있어 어울려서 시간을 즐길 처지가 쉽지 않을 것이니 혼자서 즐길 궁리를 하기도 한다. 그럴 때는 조부님께서 즐기시던 서예는 어떨까 해서 시간을 마련해 열을 올리고 있다. 다행히 큰집(고향집) 이웃에 작은집이 있어 연세가 높으시나 건강하신 숙부님께서 계신다. 고향집 지키기에 미숙한 나를 많이 보살펴 주시겠지만 특히 숙부님께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예를 즐기셨으니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기쁠 따름이다. 숙부님께서 오래 오래 함께 해주실 것을 기원 드린다.(2012. 2.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