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산 중허리를 감돌던 검은 구름이 대구 분지를 향해서 낮게 퍼지더니 드디어 겨울비가 한 방울 두 방울 뚝뚝 떨어지고 있다. 오늘은 큰 딸애의 운명적인 선고가 내리는 날이라는 걸 대구의 하늘도 알고 있는지 우울하게만 보인다. 큰 딸애의 운명은 나의 운명과 똑 같다. "하느님, 부처님 제발 오늘만은 큰 딸년의 목소리가 전화기에 울리지 않게 하소서"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믿어 본 적이 없는 소위 절대주에게 마음속으로나마 한 푼의 가식 없이 기구했다. 만약에 오늘 큰 딸애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울리기라도 한다면 수십여 성상을 모진 비바람에 시달린 나의 심신이 파삭 삭아서 가루가 될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초조한 마음을 감추기라도 할 것처럼 시집 한 권을 펼쳐놓고 암송하는 척했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변호사 연수를 하는 제 남편 따라서 미국에 간 큰 딸애의 전화를 내가 열흘 전에 받은 적이 있다. 그 날 아내는 친척의 혼인 잔치에 가고 나 혼자 낮잠을 자고 있을 때였다. 큰 딸애의 말은 가끔 아랫배가 아파서 병원에서 진찰을 했는데 대장암에 걸렸는지 모른다며 의사가 열흘 후에 진단 결과를 알려 주겠다고 했단다. 세계 최선진국 미국이라는 나라의 의사가 암일지도 모른다고 추단을 했다면 거의 맞을 거라는 딸애의 느끼한, 수만리 저쪽의 목소리 속에는 죽음 비슷한 절망의 냄새가 묻어 있었다. 죽음의 병, 대장암이란 흔하기도 하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강 건너 불로만 생각했는데, 내 딸이 대장암에 걸릴지도 모른다니 나는 믿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어 보았다. 그러나 딸애가 어쩌면 내 먼저 죽을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낭패감이 육중한 바위처럼 내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 위로 딸 셋, 아래로 아들 둘, 알토란같은 오남매가 병다운 병을 치르지도 않고 잘도 컸는데, 더구나 모두가 성실하게 공부를 잘 해서 남들이 부러워하는 명문대학을 졸업시킨 나는 야릇한 성취감에 도취된 것도 사실이었다. 큰 딸애가 의사가 되었을 때 나의 친척들이나 고향 사람들은 내가 대구 나가더니 성공했다며 부러워도 했고, 더구나 큰딸애가 변호사와 결혼할 때는 내가 조상 묘를 명당에 모신 탓이라며 칭찬을 하기도 했다. 범속한 갑남을녀로서 남들에게 부러움을 산다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자식들을 기를 쓰고 좋은 학교에 진학시키려 하는 부모들의 심정이란 대부분 나와 같으리라. 딸애가 대장암에 걸려서 나보다 먼저 죽기라도 한다면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을 일이었다. "아버지, 십일 후 진단결과가 나쁘면 전화 하겠어요. 그 날 전화 없으면 괜찮은 줄 아세요" 십일 전 딸애의 쓸쓸한 그 목소리가 내 귀에 환청처럼 들리는 듯싶다. 나는 시집을 접고 창가로 나갔다. 몇 방울 떨어지던 빗방울은 진눈깨비로 변하고 있었다. 아내도 내 마음이 초조한 것을 아는지 사위가 보낸 비디오테이프 하나를 텔레비전에 밀어 넣더니 리모컨 스위치를 누른다. 유치원에 다니는 외손자 녀석이 그 곳 흰둥이, 검둥이 꼬마들과 어울려서 춤을 추고 노래하다가 서로 붙들고 뒹굴기도 하는 모습이 사랑스럽지만 한편 저 녀석이 어미 없는 아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는 눈물이 날 것만 같다. 제발 오늘만은 뉴욕서 전화가 오지 말아야 할 텐데 하고 나는 거듭 기구해 본다. "딸애가 무사한가 보네요, 전화가 오지 않는 걸 보니 말예요. 설마 암이겠어요?" 아내는 스웨터를 걸치고 시장에 간다며 일어섰다. 제발 그랬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다시 딸의 전화가 안 오기를 간곡히 빌어 보는데 바로 그때 요란스럽게도 따르릉 하고 전화벨이 울리지 않는가. 이 때 나보다 아내가 더 초조했던지 내가 잡은 수화기를 잽싸게 낚아채고는 황급히 그녀 귀에 붙인다. "그래, 진단결과는 어떻더냐? 괜찮다 하지?" 아내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어서 나는 아내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아내의 굳은 얼굴을 알 것만 같다. 이제는 틀렸구나 하면서도 나는 마지막 요행을 생각해 본다. 초기라서 수술만 하면 살 수 있다는 딸애의 목소리가 아내의 귀에 울릴 거라는 말이다. 참으로 피를 말리는 순간이기도 했다. 나는 차마 아내의 얼굴을 볼 수가 없어서 외손자 녀석이 뛰어노는 텔레비전에 시선을 막고 있었다. 이때 아내가 내 어깨를 두 손으로 툭 치면서 "괜찮다 하네요. 폐경이 가까우면 그런 통증이 있을 수도 있대요." 나는 아내의 얼굴을 보았다.아내는 웃고 있었다. "전화 않으려다 무사한 게 너무도 좋아서 전화 했대요" 아내의 얼굴은 어린아이처럼 천진해 보였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 무사해서 기뻐서 나와 약속했던 것을 어길 수도 있겠구나, 나는 마음속으로 자문자답을 몇 번이고 해보았다. 아내가 나를 안심시키고는 대문 밖을 나갔을 때 또 전화벨이 울렸다. "아버지, 저 붙었어요. 그것도 일천 대 일로 합격했어요"라며 서울서 막내 녀석의 힘찬 목소리가 내 고막을 마구 때리는 것이었다. 대학 졸업반인 막내 녀석이 어느 큰 기업체의 신입사원 모집에 당당히 합격했다는 전화 소리였다. 큰 외국기업체의 한국지사 사원 네 명만 뽑는데 무려 사천여 명의 지원자가 몰렸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바늘구멍에 낙타가 들어가는 격이었다. 나는 애당초 바라지도 않았는데 그 네 명 중 막내 녀석이 뽑혔다니 신통할 뿐이었다. 나는 수화기를 놓고 골목 어귀까지 달려가서 아내에게 알렸다. 하늘에서는 엄청나게 많은 진눈깨비가 내리며 아내의 스웨터를 적시고 있었다. 엷은 주름살이 그려진 아내의 얼굴에 하늘의 눈물인지, 아내의 눈물인지 모를 눈물방울이 흐르고 있다. 아마도 하늘과 아내가 똑같이 감격한 눈물방울이 아닐까. "여보! 우리에게도 겹경사가 있네요" 이 말을 하는 아내가 꼭 천사 같기만 하다.
최종편집:2025-07-08 오후 04:5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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