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을 비롯해서 여러 전철역 구내 벽을 보면 전국의 명승지와 농산물 명산지를 고을마다 광고하는 벽화가 그려져 있어 마치 경쟁이나 하는 것 같은 광경을 볼 수 있다. 전철 승객들 중에는 그 가운데서 자기 고장의 그림이 나붙어 있는 것을 보면 누구나 반갑고 자랑스런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필자는 공부 때문에 고등학교 학생 때부터 고향을 떠나서 객지나 외국생활을 해 왔지만, 그래서 어머니 품을 떠난 아기가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고향을 그리워하는 회향의 정을 어찌할 수 없고, 내 고향에 대한 어떤 것을 자랑도 하고 싶은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 글을 통해서 독자들의 양해를 구하면서 몇 가지 자랑, 아니 사실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은 것이다.
필자의 고향은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장산동으로 별(星)고을, 달(月)마을, 그리고 산(山)이 있는 동네이다. 이쯤 말하면 웬만한 사람은, 특히 살림살이를 하는 가정주부들은 곧 `성주 참외`가 생각날 것이다. 이 참외는 거의 경쟁자도 없이 혼자 일등을 하는 성주의 명산품이다. 우리나라에서 첫째 가는 효자 군(孝子 郡)으로서 자타가 공인하는 사실이다.
그 외에 역사적으로는 조선시대에는 월항면에 풍수지리설을 따라 세종대왕 자태실을 두었고, 세종때에는 전주와 더불어 두 사고(史庫)를 둔 명당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필자가 지금 쓰고자 하는 본론은 그러한 자연적인 사실들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적인, 역사적인 것을 두고 표제로 한 것이다. 그것은 성주가 낳은 위인과 그 인물과의 지연(地緣)을 두고 말하려는 것이다. 고래로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란 말이 있거니와, 성주가 낳은 애국자 심산 선생은 우리의 별고을 성주의 지령을 타고 나신 탓인지도 모를 일이다.
역사를 거슬러 보면 우리나라는 주변의 강대국(중국, 러시아, 일본)에 의해서 국난을 많이 당해 왔다. 그래서 애국자도 많았고 매국자도 많았다. 가까운 과거사로서 일제로 말미암은 35년 간(1910∼1945년)은 물론, 을사늑약(乙巳勒約)까지 치면 40년 간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난을 당했거니와, 이러한 풍운의 역사를 겪어 오면서 우리는 "역사는 인물을 낳고, 인물은 역사를 낳는다"라는 역사의 증언을 실감하게 된다.
1905년의 을사늑약 때는 5인의 대신들이, 1910년의 강제병합 때는 이완용 등 10명의 대신들이 매국적인 행위를 한 반면에, 안중근을 위시한 여러 애국지사들은 항일 투쟁을 하다가 순국을 하기도 하였다. 한편 독립운동을 하던 애국자들 중에는 1919년 삼일독립선언서를 기초(起草)한 최남선이나, 동경 2·8 독립선언의 주동자였던 이광수가 후에 변절하여 도리어 매국자가 된 사례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심산 선생은 갖은 고난에도 일이관지(一以貫之) 83년의 생애로 애국의 귀감이 되었다. 3·1독립운동이 일어났을 때 심산 선생은 민족대표로 참여하지 못했다. 유림이 이 거사에 참여치 않기로 한 결정 때문에(당시 삼일독립선언서 민족대표 33인은 기독교 16인, 천도교 15인, 불교 2인) 그것을 안타까워한 김창숙은 그러나 파리평화회의에 유림의 137명 이름으로 글을 보내고, 상해에서 신채호 안창호, 김구, 박은식 등과 임시정부 수립 논의에 참여하였다.
옥중에서 조국의 광복을 맞은 심산은 그 후 국내의 혼탁한 전국을 개탄하면서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인재양성에 전심하여 1953년에 성균관대학교를 건립하고 총장에 취임하여 여생을 바치고 1962년 83세로 타계하였을 때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심산 김창숙 선생의 생애를 생각할 때 머리에 번쩍 떠오르는 것이 송죽대절이란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래로 팔도 사람의 기질을 말할 때 경상도 사람의 기질을 송죽대절 곧 소나무처럼 변하지 않고, 대나무처럼 곧다고 하는 것이다.
참고로 예를 들면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三峰)이 태조의 명을 받고 풍수지리에 입각한 조선 팔도 인물평을 한 일이 있는데 오늘날까지도 흔히 통용되고 있는 것으로 아래와 같은 것이다.
경기도는 경중미인(鏡中美人)으로서, 거울에 비친 미인과 같고
충청도는 청풍명월(淸風明月)로서, 맑은 바람 속의 밝은 달과 같으며
전라도는 풍전세류(風前細柳)로서, 바람 앞의 가는 버들과 같으며
경상도는 송죽대절(松竹大節)로서, 소나무나 대나무같이 변치 않고 곧은 절개를 가졌고
강원도는 암하노불(岩下老佛)로서, 바위 아래의 늙은 부처님과 같고
황해도는 춘파투석(春波投石)으로서, 봄 물결에 돌을 던지는 듯하고
평안도는 산림맹호(山林猛虎)로서 산림 속의 사나운 호랑이 같고
함경도는 이전투구(泥田鬪狗)로서 진창에서 싸우는 개 같은 것이라고 평하였다.
위의 말 가운데서 경상도인인 심산선생의 성품 기질은 바로 송죽대절인 것으로 떠오른다. 많은 수목 가운데서 소나무와 대나무는 계절의 변화에도 변치 않는다는 특질이 있는 것이 독특하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위인을 그 하나는 조선조의 사육신 중 대표격이라고 볼 수 있는 매죽헌 성삼문의 충절가에서, 다른 하나는 고려 말의 충신 포은 정몽주의 단심가에서 볼 수가 있다. 이제 이 두 위인이 지은 시조를 보자.
■ 성삼문의 시조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 하니
봉래산 제 일봉의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때 독야청청 하리라
■ 정몽주의 시조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성삼문은 그의 절개를 금강산 최고봉의 소나무에 비유했고, 정몽주는 고려에 대한 불변의 충의를 읊었던 바, 그가 칼을 맞아 피를 흘린 자리에서 대나무가 솟아나서 `선죽교`라 일컬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소나무가 변치 않는다는 것은 우리나라 애국가 제2절 남산 위의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 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에도 나타나 있다.
- 경상인의 송죽대절을 그대로 사신, 별고을의 큰 별이 되신 심산 김창숙 선생을 추모하며, 8·15 광복절을 맞아 그의 영전에 이 글을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