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우리 아들 창호가 미니 컴포넌트형 DVD 플레이어 한 대를 사왔다. 도배를 하고 찬장과 신장을 새로 짜드렸으며 조명시설도 개선한 것을 축하하기 위하여 사다 준 것 같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른다. JVC라는 유명한 전축과 오디오 회사의 제품이다. 디스크를 넣을 수 있는 본체와 양옆에 있는 스피커 두 대를 다 합해도 수십 년 전에 우리가 애용하던 라디오만한 크기의 오디오이다. 컴팩트 디스크 한 장을 넣어보니 소리가 얼마나 웅장한지 실로 첨단 IT 기술의 발전과 세상의 변화를 새삼 느끼게 하는 것 같았다. 문득 1950년 봄에 성환에 있는 축산연구소 숙직실에 라디오를 사다 준 기억이 났다.
4·19 직후에 농림부에서 수습행정관으로 근무하던 내가 연구관으로 발령을 받아 축산연구소 가축과 중소가축계장으로 내려갔다. 그곳 생활에 채 익숙하기도 전에 돌아가면서 숙직을 하던 기능직 공무원 몇 사람이 나에게 면담을 신청해왔다.
내용인즉 그동안 여러 해 동안 숙직실에 라디오를 하나 비치해 줄 것을 상사들에게 건의했으나 아직도 실현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나더러 이 숙원사업을 꼭 이루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사실 그때는 텔레비전이 없던 시절이라 라디오가 문명이기의 전부였다. 그것으로 뉴스를 듣고 음악을 들으며 또한 연속극까지를 즐겨야 했다. 따라서 라디오는 지루한 야간 숙직근무의 반려자로서 더할 수 없이 좋은 친구였다. 그것을 듣느라 방범이나 화재예방 같은 기본 숙직기능을 손상시키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 나는 가까운 시일 안에 라디오를 한 대 사다 주겠다고 약속을 하였다.
얼마 후 농림부에 출장을 갈 일이 있었다. 업무협의를 마친 다음 그 부근에 있는 남대문 도깨비 시장을 찾아갔다. 온갖 외제품을 다 팔고 사는 곳이었다. 어느 가게에서 나는 중고 라디오를 하나 고를 수 있었다. 내셔널 라디오였다. 틀어 보니 소리가 얼마나 잘 나는지. 이걸 보자기에 싸서 성환으로 운반하였다. 그날 그걸 들고 숙직실을 찾아갔다. 모두들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들은 마치 나를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를 대하듯 그렇게 고마워하였다.
얼마 후에 들은 얘기다. 초저녁에는 인근에 사는 주민들이나 연구소 내 다른 일용직들도 그 라디오를 들으러 우리 숙직실을 찾아온다는 것이다. 라디오조차도 국내생산이 안되던 시절, 그나마 상류층에서나 가지고 있던 그 라디오, 지금 과연 어떤 사람이 이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며 살고 있는 것일까? 휴대폰에마저 온갖 기능이 다 들어 있는 요즈음 같은 세상에 라디오를 껴안고 기뻐하던 그 사람들의 마음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
1980년대 초반에 나는 그때 돈 200만 원이나 들여서 전축 세트를 구비한 일이 있다. 앰프는 어느 회사 제품, 턴테이블은 어느 회사 제품, 스피커는 어느 나라 제품 하면서 말이다. 지나간 일이지만 그 당시 용산에 있는 20평형 공무원 아파트 값이 200여만 원밖에 되지 않았다. 요새 같은 부동산 전성시대를 기준으로 말하자면 차라리 그 아파트를 한 채 사두었더라면 지금쯤 나는 부자가 되어 있지 않을까? 이번에 우리 거실에 있던 집채만한 일제 소니 TV를 내다 버리고 대신에 벽걸이형 고화질 TV를 들여 놓았다. 세상은 이렇게 빨리 변하고 있다.
라디오를 들으며 행복을 느꼈던 그 시절은 가고 IT천국을 만나 온갖 문명의 이기를 다 갖추었는데도 우리나라에 우울증 환자가 500만 명이 넘는다고 하니 이 무슨 해괴한 조화인가? 조금만 불편하면 소리 지르고 사소한 의견 차이에도 이혼을 해 치우는 요즈음 젊은이들의 사고의 기준은 무엇일까? 국민소득 50달러도 안되던 그 시절, 할 수 있었던 일은 고생이었고 겪을 수 있었던 것은 가난뿐이었는데도 우리는 꽃을 보면 아름다움을 느끼고 새소리를 들으면 기뻐했는데…. 과연 요즈음 사람들이 더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몇 달 전에 우연스럽게 나는 성환에 있는 그 시험장을 다시 방문하는 기회가 있었다. 자유당 시절에 숙직을 하던 그 직원들의 안부를 물었더니 거의 모두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정년 인생은 구름처럼 흘러만 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