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릴 때부터 눈물이 많고 감상에 빠질 때가 많아서 부모님으로부터 사내답지 못하고 늘 푼수가 없는 자식이라고 꾸중을 들었다. 투명한 에메랄드빛 가을 하늘이 내 머리 위에 성큼 펼쳐져 있거나 낙엽이 한 잎 떨어지는 걸 보아도 슬퍼하고, 집에서 기르던 강아지 한 마리가 죽어도 오랫동안 비탄에 젖어 있기도 했다. 가산 이효석 선생이 "감상이란 부끄러울 것 없는 생활의 영원한 한 제목일 겁니다."라고 한 것처럼 감상과 눈물은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른다. 가을이란 계절은 많은 사람의 가슴에 그리움과 애상과 회환을 움트게 할 것이다. 예순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해마다 가을이 오면 사춘기 소녀처럼 간절한 상념에 빠지곤 하는데 이것은 오래전 가을에 있었던 절실한 별리의 경험 때문이라면 핑계일까. 성주댐에서 약간 경사진 국도를 따라 북쪽으로 시오리쯤 올라가다 보면 `살티`라는 고개가 있다. 살티는 성주군과 금릉군(지금은 김천시로 편입됨)의 경계이고 분수령이기도 하다. 이제는 이 길을 확장하고 포장을 해서 국도로 승격되었지만 십여 년 전만 해도 리아스식 해안처럼 굽이굽이 돌아가야 했던 좁은 지방도였다. 살티고개에 올라서면 저 멀리 김천 시가지가 아득하게 펼쳐 있고, 더 지나서 북쪽에는 운무에 덮인 추풍령으로 올라가는 증기기관차의 기적 소리가 구슬피 들려오기도 했다. 어느 해 김천으로 시집간 누나 집에 가려고 어머니를 따라가다가 살티고개에 있는 주막집에서 잠시 쉬었는데 당시 어린 소년이던 나는 멀리 추풍령 쪽에서 들려오는 증기기관차의 기적 소리에 넋을 잃고 살티고개 한복판에 오래 서서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만약 그 기적 소리가 추풍령에서 들려오는 증기기관차의 기적이 아니고 평범한 들판을 달리는 디젤기관차의 기적 소리였다면 내가 그처럼 비감에 침잠했을까. 나는 아주 먼 나라에서 다시는 갈 수 없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이방의 소년처럼 서글퍼 했었다. 운무가 자욱이 깔린 추풍령으로 올라가는 보이지 않는 증기기관차의 기적 소리는 나의 심금을 절절하게 울렸던 것이다. 내가 비교적 조숙했었는지는 몰라도 내 나이 열 살이 넘어갈 무렵부터 인간의 생로병사며 그리움, 슬픔, 허무, 무상 등 마치 내가 석가모니나 된 것처럼 형이상학적인 과제에 몰입하기도 했다.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6.25전쟁이 터졌고, 이듬해 1.4후퇴 때 우리 집에는 경기도 수원에서 내려온 피난민 가족이 건넌방에 머물게 되었다. 중년 부부와 내 또래의 사내아이와 진옥이라는 여고생 등 네 식구였다. 당시 우리 집은 농토가 비교적 많았고 집도 커서 일군이 필요하던 참이었다. 아버지는 농사일을 돕는 조건으로 그들 가족을 우리 집에 살게 했다. 살티고개에서 동남쪽으로 십리쯤 떨어져 있는 우리 마을 싸리골에서 진옥의 출현은 열네 살이던 나로서는 실로 경이로운 신천지의 전개였다. 사근사근한 경기도 표준말씨며 상큼하게 빠져나온 그녀의 하얀 목덜미에 보송보송 솟아난 솜털 하나하나도 나의 영혼을 울리지 않는 게 없었다. 개구쟁이에다 공부를 지독하게 싫어했던 나에게 부모님은 진옥을 나의 가정교사로 만들어 주었다. 나는 진옥이가 너무도 좋아서 그녀의 착한 학생이 되었고 그녀가 읊어 주는 황진이의 시 한 편을 듣고만 있어도 마치 그녀가 수백 년 전에 죽은 절대가인 황진이가 환생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내가 진옥을 얼마나 좋아했으면 6.25전쟁이 오래오래 계속돼서 그녀가 영원히 내 곁에만 있었으면 좋겠는데 했겠는가. 그러나 진옥의 가족은 이듬해 가을(1952년) 수원으로 귀향했다. 진옥이가 우리 집을 떠나기 전날 그녀는 우리 집 뒷동산에 나를 데리고 가서 작은 소나무 두 그루를 심었다 피란시켜 준 우리 가족의 은혜를 잊지 못해서 그녀는 나와 의남매의 결의를 맺자며 그 기념으로 소나무 두 그루를 심자는 거였다. 이름하여 `남매소나무`라 했다. 나는 `부부소나무`였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차마 그 말을 못했다. 남매소나무라 해도 나는 하늘로 부웅 떠오를 만큼 감격했으니까. 이튿날 나의 부모님은 동구 밖에서 그들을 배웅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따라 살티고개까지 갔다. 살티고개에서 마침 김천으로 가는 트럭 하나를 만나 진옥의 가족은 그 차를 타고 갔다. 그들이 탄 차가 점점 작아지더니 드디어 한 점으로 변해서 김천 시가지에 흔적도 없이 흡입되고 말았다. 얼마 후 그들이 탄 증기기관차인지는 몰라도 추풍령 쪽에서 증기기관차의 기적 소리가 아득히 먼 옛날의 전설처럼 구슬피 들려왔다. 나는 그만 살티고개 한복판에 주저앉고 말았다. 추풍령이란 기묘한 어감, 그리고 그 영마루에 깔린 운무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증기기관차의 기적 소리가 팔십 리 남쪽 살티고개에 홀로 앉은 섬약한 사춘기 시골 소년 하나를 마침내 영탄의 미아로 만든 것이다. 이제 나는 노인이 되었고, 진옥은 훌륭한 대학교수로서 연전에 정년퇴직했다가 지난 여름에 숙환으로 타계했다. 내게 남은 그녀의 흔적은 수령 50년이 넘은 남매소나무 또는 부부소나무 두 그루였는데 그 소나무마저 우리 마을을 관통하는 도로 개설 때문에 없어졌다. 나는 지난 휴일 살티고개에 갔었다. 증기기관차의 기적소리 대신 디젤기관차의 기적소리를 들으며 주책없는 사내처럼 하진옥 님을 목이 터져라 추풍령을 향해 불러 보았다. 남매소나무 두 그루에 칡넝쿨이 한 묶음으로 엉겨 있던 것을 상상할 때마다 노인답지 않게 얼굴을 붉히고 황홀한 정감에 몰입해 본다. 내게 남은 것은 그것뿐이다. 그래서 나는 그 없어진 소나무들이지만 `부부소나무`라고 이름 짓고 싶다.
최종편집:2025-05-23 오전 10:4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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