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5년 아펜젤라와 언더우드 두 선교사가 한국에 첫발을 내디디며 기독교가 전파되기 시작했다. 학교를 설립하고 병원을 세웠다. 그런데 남녀유별의 유교전통에 젖어있는 한국 여성들은 중병에 걸려도 서양인 남자의사에게는 가지 않았다. 그래서 미국 선교부는 한국에 선교사로 헌신할 여자의사를 모집했다. 로제타라는 여성이 지원했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에서 병원실습을 하면서 의료선교사의 준비를 했다. 거기서 캐나다 출신의 젊은 의사 윌리엄 제임스 홀을 알게 되었다. 그는 로제타의 미모와 성실성에 반해 그녀에게 청혼을 했다. 그러나 거절했다. 왜냐하면 윌리엄은 이미 중국 선교사로 가기로 내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로제타도 윌리엄을 좋아하고 있었지만 조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조선에 오기 위해 청혼을 거절하고 1890년 25세 처녀의 몸으로 한국에 들어왔다. 윌리엄은 선교부를 찾아가 선교지 변경을 신청해서 1891년 12월에 그도 한국으로 들어와 다음 해에 벙커 선교사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서울에서 광성고등학교의 전신인 광성학당을 세우고 진료를 하며 선교하던 중, 평양 선교를 위해 개척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첫 아들 셔우드가 태어난 이듬해에 메켄지 목사와 함께 평양에 들어갔다. 평양은 외국인에게 증오심을 가진 군중들의 박해가 심하다는 말을 들었지만,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희생시켜 이 도시의 문을 여실 생각이라면 나는 그 희생자가 되는 것을 피하지 않겠다고 각오했다. 그 해 7월에 일어난 청일전쟁으로 평양은 전쟁터가 되었고, 윌리엄 선교사는 그곳에서 수많은 사람을 치료하다가 자신이 발진티프스에 감염되어 서울로 돌아왔다. 한국에 온 지 3년만에 아내와 아들의 손을 잡고 마지막 기도를 하고는 숨을 거두었다. 1894년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되었다.  남편 홀이 세상을 떠날 때 로제타는 만삭의 몸이었다. 어린 아들 셔우드를 데리고 아이를 낳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귀여운 딸 에디스를 낳고, 딸이 두 살 되었을 때 캐나다에 있는 남편 윌리엄의 모교회를 방문하게 되었다. 윌리엄을 꼭 닮은 셔우드를 보면서 교인들이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로제타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사랑하는 딸아, 네 남편 윌리엄이 이루지 못한 조선 사랑을 네가 이루어라." 로제타는 아들과 딸을 데리고 다시 한국으로 왔다. 그런데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어린 딸 에디스가 풍토병으로 죽게 되어 남편 묘 옆에 묻으면서 기도했다. "하나님, 남아있는 아들 셔우드와 조선에서 오랫동안 사역할 수 있게 생명을 지켜주세요." 로제타 선교사는 어린 셔우드를 키우면서 조선 사랑을 실천해 나갔다. 평양에 남편 홀의 순직을 기려서 세워진 홀기념병원에서 근무하면서 여자 환자를 위한 광혜여원을 개원했다. 로제타 홀이 여성 의사를 양성하기 위해 1928년에 세운 조선여자의학강습소는 경성여의전, 수도여의대, 우석의대를 거쳐 현재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이 되었다.  로제타는 한국의 여성 맹인들에게도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미국에 가서 점자법을 배워 한글에 맞게 고쳐 맹인 여성에게 점자교육을 시작했다. 지금 대구대학교 특수교육과는 로제타가 시작한 특수교육의 열매로 세워졌다. 서울 동대문 옆 이화여대부속병원 또한 로제타 선교사가 세운 병원이다. 인천의 간호대학, 인천기독병원도 로제타 선교사가 세웠다. 그녀는 34년간의 한국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큰 일을 이루었다. 선교사 은퇴 후 미국에 돌아가 85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면서 "내 사랑 조선의 땅, 내 남편과 내 딸이 묻혀있는 땅에 묻어 주오"라고 유언했다. 그래서 그녀의 유해도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되었다.  로제타의 아들 셔우드는 "나도 의사가 되어 이 땅에서 결핵을 퇴치하리라"는 생각으로 미국에 가서 결핵 전문의가 되어 돌아왔다. 1925년부터 해주구세병원에서 일하다가 1928년 해주결핵요양원을 설립했다. 그리고 결핵에 대한 계몽과 선전을 위해 한국 최초로 남대문을 그린 크리스마스실을 1932년 12월에 발행했다. 아버지 어머니의 조선 사랑을 이어가던 셔우드 홀은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스파이로 몰려 한국에서 쫓겨나 인도로 가게 되었다. 아내와 세 아들을 데리고 한국을 떠나면서 항구의 나뭇가지에 태극기를 걸고 가족들과 함께 만세삼창을 했다고 한다. 셔우드의 아버지가 세운 광성고등학교는 1984년에 그 부부를 한국으로 초청했다. 91세의 나이로 사랑하는 한국 땅을 밟은 셔우드는 이런 말을 했다. "I still love korea(나는 여전히 한국을 사랑합니다). 제가 죽거든 제가 태어나서 자랐던 사랑하는 이 나라, 내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버지, 누이동생이 잠들어있는 내 조국 한국 땅에 묻어주시기 바랍니다."  "내게 줄 수 있는 천 번의 생명이 있다면 나는 그 천 번의 생명을 모두 조선을 위해 바치겠다." 양화진 묘원에 25세 청춘으로 묻힌 루비 켄드릭 선교사의 묘비문이다. 우리 모두는 사랑의 빚진 자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국의 푸른 눈이 그렇게도 사랑했던 이 나라 내가 더욱 사랑하자.
최종편집:2025-05-23 오전 10:3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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