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개인으로 보든지, 가정으로 보든지, 국가적으로 보든지, 슬픔이나 기쁨으로, 또는 괴로움이나 즐거움이 씨줄과 날줄로 얽혀 있다.
우리나라의 5천 년 역사를 보면 거기에는 참으로 우여곡절이 `칠난팔고(七難八苦)`라 할 만큼 많았다. 그러한 고난의 역사를 가진 것에는 그러한 연유가 없지 않거니와 그것은 몇 강대국에 인접해 있는 지정학적인 위치를 우선 들지 않을 수 없다.
19세기에 우리나라를 둘러싸고 있는 중국 러시아 일본이 각축을 하여 마침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여 우리나라를 강탈하여 1905년에는 외교권과 군사권을 박탈당하고, 1910년에는 마침내 우리나라(당시 대한제국)의 주권이 일본에 강탈 당하여 35년간 일제의 식민지로서 갖은 고난을 다 겪었다.
그런데 필자는 1905년과 1910년에 우리나라와 일본과의 중대사건을 논함에 있어 먼저 지금까지 거의 대다수의 사람들이 잘못 써온 말을 시정하고자 한다. 즉 1905년(을사년)의 사건이나 1910(경술년)의 사건을 `조약`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 말이다. 왜냐하면 조약이란 당사자인 두 국가가 대등한 관계에서 맺어져야 하는데, 1905년이나 1910년이나 다 우리나라가 일본과 대등한 관계에서 맺어진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일본의 강요에 의하여 일방적으로 맺어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그 역사적 사건을 `을사보호조약`이라 불러 왔으나 바른 말로 한다면 `을사늑약`(乙巳勒約)이라 해야 옳고, 1910년의 역사적 사건도 양국이 대등한 관계에서 맺은 것이 아니므로 `합방`(合邦)이 아니라 `경술강제병합`(庚戌强制倂合)이라 해야 옳다.
이 두 가지 사건은 일본으로서는 큰 외교적인 성취로서 자랑스럽게 생각할 일이었지만, 우리로서는 큰 외교적인 과오로서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을사늑약의 대표가 된 이완용·이지용·박재순·이근택·권중현 등을 `을사오적신`이라 부르고, 1910년의 역사적 사건에 관여한 한국총리대신 이완용 · 내부대신 박재순 · 탁지부대신 고영희 · 농상공부대신 권중응 등을 `매국노`라고 부르며 그 사건 자체를 `경술국치`라 한다.
우리는 이상과 같이 아픔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 기쁨의 역사도 있었던 것을 잊을 수 없다. 그 기쁨의 역사는 우리 조상들의 노력으로써만 아니라 우리의 우방국의 도움을 받아서 이루어진 사실에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조상들 중에는 우리나라가 일본에 빼앗긴 주권을 찾기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지사들도 많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우방국의 도움으로 1945년 8월 해방을 맞았고 광복이 되어 마침내는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오늘의 번영을 누리게 된 것이다.
우리가 1년 열두 달의 달력을 넘기면서 우리나라의 과거사를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의 슬픔과 기쁨의 역사가 얽혀 있는 한 달이 8월이다. 8월 15일에는 해방기념일과 광복절이 함께 있고, 8월 29일은 나라를 일본에 빼앗긴 날이니 우리가 잊을 수 없는 날이다.
해방 기념일을 맞아 우리에게 일제로부터의 해방을 주신 우방(태평양전쟁 승전국)에 감사하고, 광복절과 건국 기념일을 맞아 조국광복을 위해 생명을 바친 선열들의 순국정신을 본받고, 8월 29일에는 오늘의 우리 조국의 번영을 끝까지 수호할 결의를 다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