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마(胡馬)는 북풍에 울고 월나라 새는 남쪽 가지에만 앉는다는 옛 님들의 말을 인용할 것도 없이 무릇 생명이 있는 것은 귀소본능이 있을 것이다.
이른바 만물의 영장이란 사람인 나도 고향을 순간도 잊은 적이 없다. 나의 고향은 대구에서 백여 리 되는 성주 서쪽 지방인 후곡리, 또는 후리실이란 산골마을인데 산악지대이면서도 비교적 기온이 낮은 고원지대여서 저 유명한 성주 특산물인 참외 농사도 짓지 못하는 그야말로 가난한 내 고향이다. 그러나 후곡리에서 서쪽으로 오 리쯤 되는 곳에 대가천이란 낙동강 지류 한 줄기가 김천의 수도산에서 고령군 우곡면을 흐르는 낙동강 본류까지 백여 리를 남북으로 흐르고 있는데 대가천은 산자수명 별유천지다.
절대주는 우리 고장 사람에게 척박한 산야를 준 대신에 수려한 개천 하나를 보상해 주었는지 모른다. 인걸은 지령이라 했던가, 대가천이 수려했기에 대가천변엔 큰 인물이 많이 출생했던가 보다.
대가천 중류에 자리 잡은 갈말은 퇴계와 남명 조식의 수제자이기도 한 한강 정구라는 대성리 학자의 출생지이고, 우리나라 최초의 시조 시인인 이조년 선생의 묘소도 고령군 운수면 대가천 근처에 있고 그분도 대가천과 가까운 우리 성주군에서 출생했다.
호마는 북풍만 불면 울부짖고 월나라 새는 남쪽 가지에만 옮겨 앉듯이 사람인 나도 그들 짐승들과 같이 고향 그리는 본능은 똑같은 탓인지 고향을 떠나온 지 사십여 년이 넘어도 순간도 고향 산하를 잊은 적이 없다.
그런 탓이었을까. 동서고금을 통해서 하늘의 별처럼 수없이 많고 많은 시며 시조며 주옥같은 문장들이 있어도 인생의 노경에 접어든 이 순간까지도 이조년 선생의 다정가(多情歌)와 한강 선생의 한시 한편을 이 세상 어떤 문장보다 좋아하고 그래서 애독하고 애송을 한다.
두 분의 출생지가 대가천과 가까운 나의 고향이어서인지는 몰라도 나는 두 분의 글을 어떤 문장보다도 좋아하고 그래서 매일 한두 번씩 써 보기도 하고 암송을 하거나 신나게 소리 내어 읊기도 한다.
이것은 나의 일생 동안 습관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운명적인 나의 혈연 때문에 두 선생의 작품보다 몇 배 더 나의 영혼을 울리고 그것 때문에 내 눈에서는 피눈물을 흘리게 하는 신생 토속민요하나가 있다.
그것은 이름 없는 내 고향의 첩첩산중에서 핀 산유화 두 송이가 죽을 때까지 부르다가 저 세상에 가서도 부를지도 모를 한 맺힌 두 무명초의 애간장을 녹이는 무명의 민요이기도 하다.
나에게는 누나가 다섯이 있었는데 8.15 해방 전후로 전염병이나 다른 불치의 병으로 시집가서 또는 혼전에 다 죽고 이제 80세가 된 막내 누나 하나만 남았다. 다섯 누나 중 셋째 누나는 얼굴도 미인이었고 노래도 잘 불렀고 춤도 잘 추었고 공부도 잘했으며 언제나 상글상글 웃기만 했다.
그 누나는 8.15 해방이 되던 1년 전에 소학교 교사와 결혼했다. 셋째 누나의 부부는 금슬이 깨가 쏟아질 듯이 좋았다.
그러나 8.15 해방이 되던 이듬해 자형이 장티푸스에 걸려서 죽었다. 처음에는 누나가 그 병에 걸렸는데 자형이 필사적으로 누나를 간호한 탓인지 누나는 건강을 회복했다. 그러나 자형이 전염되어서 그만 죽고 만 것이다. 그때부터 셋째 누나는 본정신이 아닌 여인으로 변했다. 거의 미친 사람 같았다.
자형이 죽은 후 누나는 우리 집에 있었다. 누나는 우리 집의 뒷동산에 올라가서 자형의 무덤이 있는 동쪽(성주읍 근처에 자형 무덤이 있음)을 향해서 망부석처럼 서 있기만 했다. 부모님은 누나에게 재혼을 하라 해도 꿈에도 재혼할 뜻이 없다고 했다.
셋째 누나의 나이가 24세, 내 나이가 13세 때이던 이른 봄 아침이었다. 그날도 누나는 뒷동산에서 동쪽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내가 누나 곁에 가서 "누나야 천날 만날 이러고만 있지 말고 엄마 말대로 다른 데로 개가하란 말이야" 하고 나는 어린아이답지 않게 말했다. 그때 누나는 아무 말도 않고 나를 힘껏 부둥켜안더니 노래 하나를 부르는 게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