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서울대학교 원로 교수가 된 H교수의 대학원 학생 시절에 있었던 얘기다. 그때, 그러니까 1970년대 중반에 수원캠퍼스 실험목장 사무실 뒤편에 대학원생과 교수들이 숙식할 수 있는 조그마한 두 평짜리 방 일곱·여덟 개가 있었다. 방이래야 동쪽으로 출입문이 있고 서쪽 벽에 들창문이 하나 있는, 그래서 벽장 하나 없는 감방 같은 것이었다. 그러니 옷가지는 있는 데로 한쪽 벽에 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해 여름내 대학원생 H군이 겪었던 일이다. 어느 날 밤에 하도 더워 들창문을 있는 데로 다 열어놓고 깊은 잠에 빠졌다가 아침에 일어나 보니 밤사이 어떤 분(도둑?)이 와서 그 들창문으로 벽에 걸어 놓았던 이 대학원생의 옷가지들을 몽땅 걷어 간 것이다. 잠옷 바람으로 나갈 수도 없고, 참으로 난처한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이웃 방에 함께 거주하던 동료 대학원생 중 마침 H군처럼 체구가 아담한 친구가 있어서 그이의 바지와 웃옷을 빌려 입고 여느 때처럼 연구실에 나갔다고 한다. 재미있었던 것은 정작 그 학생은 입도 벙긋 안 했는데 벌써 H군의 지도교수였던 나는 이 도난 사건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집에서 몇 가지 옷과 라디오까지 가져다 H군에게 주었다.  그날 복도에서 H군을 만난 나는 작년에 상수 할 때 입고 온 그 신사복도 잃어버렸느냐고 물어보았다. 사실 그 양복은 H군이 청운의 꿈을 품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에 들어가서 공부하러 우대지방(수원)에 간다고 부모·형제들이 공동출자하여 만들어 준 것이었고 그이로서는 난생처음 입어 본 세비로 양복이었을 것이다.  며칠 사이에 우리 영양학연구실에서는 대학원생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거두어 H군에게 주면서 그 유래 깊은(?) 양복을 다시 해 입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참 훈훈한 미담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간단히 끝나지 않았다.  세월이 30여 년이나 흘러간 후 연구실 원로 식구들이 모여서 옛날 서둔동에서 있었던 여러 가지 추억담으로 이야기꽃을 피운 적이 있었는데 한참 동안 이러 저러한 얘기를 하다가 서둔동 좀도둑 얘기가 나왔다. H모 교수의 양복 도난 사건이 또 다시 화제에 오른 것이다. 그러던 중 몇 년 후면 정년퇴직을 하게 될 L교수가 정색을 하면서 그때 H교수가 입었던 그 신사복의 바짓가랑이 하나는 자기 것이라고 말하면서 바짓가랑이의 소유권 주장을 하고 나서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모두가 박장대소를 했었다. 그런데 또 다른 재미있는 이야기가 이 양상군자와 얽혀있었다.  농화학과 대학원에서 공부하던 K군은 H군의 양복 도난사건이 있었던 몇 해 전에 학교 뒤에 있는 서둔동 하숙집에서 역시 도둑을 맞았다고 한다. 그해 가을에 석사학위 논문 심사를 받기 위해서 써 놓은 논문원고까지 몽땅 도난을 당했다는 것이다. 잃어버린 옷가지랑 책들도 아쉽지만 만년필로 쓴 학위논문을 도난당한 것은 참으로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고 한다. 며칠 후 실험 농장에서 연락이 와서 K군이 농장으로 달려가 보았더니 서둔동 밤 신사가(좀도둑이) 그 논문을 논바닥에 버리고 간 것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물에 젖은 논문을 찾기는 했지만 누런 시험지에 잉크로 쓴 자료들은 거의 알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는 지금과 달라서 여름 학위수여식이 따로 없고 1년에 한 번 2월에 졸업식이 있는 때이어서 그 K군은 실험결과를 다시 정리해서 학위논문을 복원은 했으나 이 서둔동 좀도둑 덕택에 대학원 졸업을 1년이나 늦게 할 수밖에 없는 웃지 못할 일이 있었다는 얘기다. 따지고 보면 H군의 좀도둑 사건보다는 피해가 더 심각한 한수 위의 도난사건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서둔동 좀도둑 얘기는 이렇게 간단히 끝나지는 않는다. 캠퍼스를 이전하기 전 그때 수원 캠퍼스의 도서관 자리에 농장이 있을 때 어느 여자 대학원생이 토마토 재배실험을 하였다. 실험용 토마토가 거의 익었을 무렵 그 여자 대학원생이 토마토의 개수며 무게를 달고 그 자료를 가지고 논문을 쓰려고 했는데 자료 수집 전날 밤에 잘 익은 토마토를 대부분을 도둑맞았다는 것이다.  다음날 야장을 들고 포장을 나왔던 그 여자 대학원생의 울음소리는 너무나 처절하여 500 m나 떨어진 육교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결국 이 토마토를 훔쳐 간 사람이 농대 학생인지, 그 악명 높은 야밤 신사인지는 아직도 모른다고 한다. 나중에 들은 얘기인데 그때 그 여자 대학원생은 이미 어느 대학에서 정년퇴임을 한 백발이 성성한 노교수라는 것이다. 그 할머니 교수께서는 지금도 수원캠퍼스에서의 토마토 도난사건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며 살고 있을 것인지?  어쨌든 서둔동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던 사람들은 제각기 크고 작은 도난사건을 겪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웃고 넘어갈 수밖에 없는 추억이 되었다. 가난하던 시절에 이런 일을 저질렀던 좀도둑들도 이제는 모두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었겠지? 그날 H군의 방을 방문한 그분도 이제 죄책감에서 벗어나 마음 편하게 지내길 바란다.  최근에는 이런 좀도둑이 서둔동에서 깨끗이 사라졌다고 한다. 아쉽지만, 수십 년 전에 있었던 좀도둑 얘기는 우리들만이 간직해야 할 아름다운 추억일는지도 모르겠다. (2008. 11. 20).
최종편집:2025-05-23 오후 05: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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