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그들은 우리의 이웃이면서 언제나 우리를 괴롭혀 왔다. 옛날 고려 시대부터 해적으로 우리 재산을 약탈해 갔고 양민을 수없이 납치 학살했다. 한때는 닥치는 사람마다 코를 베고 귀를 잘라서 소금에 절여 본국으로 보내어, 많으면 많을수록 그 무공을 자랑하던 때도 있었다. 지금도 일본 교토에는 우리 조상들의 코무덤(鼻塚), 귀무덤(耳塚)을 두고 그들은 그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1895년 10월 3일 일본공사관 밀실에서 미우라 공사가 주동이 되어 반일세력의 핵심이요 러시아와의 연결고리인 명성왕후 시해의 구체안이 확정되었다. 이들은 서울 주둔 일본군 수비대 주력으로 영사경찰, 낭인배들을 동원했다. 사후 책임전가를 위해 왕후와 정치적 대립관계에 있던 대원군과 일본인 교관의 조선군 훈련대를 이용하기로 했다.
10월 8일 새벽 일단의 일본인 패들이 대원군과 그의 아들 이재면을 납치하여 경복궁으로 향했다. 한편 인본인 교관은 야간훈련을 실시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조선군 훈련대를 경복궁까지 유인했다. 새벽 5시 경복궁 담을 넘어간 일본인들이 일본군의 엄호하에 광화문을 열어제쳤다.
일본군에 이어 일본인들이 호위한 대원군의 가마와 훈련대가 밀어 들어갔다. 그 과정에서 궁궐시위대 병사 8∼9명과 훈련연대장 홍계훈이 희생되었다. 경복궁에서 숙위 중이던 시위대 다이(William MoEntyre Dye)와 연대장 현흥택의 지휘하에 비상소집된 시위대가 저항했으나 무기의 열세로 곧 무너졌다. 이후 왕후의 거처에서 만행이 진행되는 동안 일본군은 사방의 출입구를 봉쇄했다. 주한 영국영사 힐리어(Walter C. Hillier)는 사건의 현장을 이렇게 보고했다.
"건청궁의 앞뒷문을 통해 일본군의 엄호하에 침입한 민간인 복장의 일본인들은 곧바로 왕과 왕후의 처소로 돌진하여 몇몇은 왕과 왕태자의 측근들을 붙잡았고, 다른 자들은 왕후의 침실로 향하였다. 이때 궁내에 있던 궁내부대신 이경직의 급보를 받고 왕후와 궁녀들이 잠자리에서 뛰쳐나와 숨으려던 순간이었다. 그때 흉도들이 달려오자 이경직은 왕후를 보호하기 위해 두 팔을 벌려 가로막았다. 흉도들 중 하나가 왕후를 찾아내기 위해 왕후의 사진을 손에 쥐고 있었는데, 이경직의 그러한 행동은 오히려 흉도들에게 왕후를 알아보게 하는 단서가 되었다. 이경직은 내리친 칼날에 양 팔목이 잘려 쓰러져 피를 흘리며 죽었다. 왕후는 뜰 아래로 뛰쳐나갔지만 곧 붙잡혀 넘어뜨려졌다. 흉도들은 왕후의 가슴을 짓밟으며 일본도를 휘둘러 거듭 내리쳤다. 실수가 없도록 확실히 해치우기 위해 그들은 왕후와 용모가 비슷한 몇몇 궁녀까지 함께 살해했다. 한둘의 시신이 숲에서 불태워지고 나머지는 궁궐 밖으로 옮겨가 처리되었다."
상황이 일단락되자 일본인들은 황후의 침소까지 약탈하고 두려움 없이 유유히 광화문을 빠져나갔다. 한편 일본공사관에서 초조하게 사태의 결과를 기다리던 미우라는 고종의 부름에 응한 형식으로 입궐하여 고종을 압박해서 당일로 신내각을 조각하게 했다. 그것이 제4 김흥집 내각이다.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가던 당시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제암리 교회 청년들과 천도교 김상렬 등 민족주의자들이 4월 5일 발안 장날에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벌였다. 이에 당황한 일본경찰은 무차별 사격을 가해 많은 부상자를 냈다. 10일 후인 4월 15일 일본군 육군중위 아리타 다케오를 중심으로 일본헌병들은 4·5만세시위 당시 일본경찰이 주민들에게 행한 만행에 대해 사과하겠다고 하며 15세 이상의 남자들을 제암리교회에 모이게 했다. 그리고는 교회 문을 모두 걸어잠근 다음 집중사격을 하고 교회에 불을 질렀다. 밖에서 남편을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아낙 2명의 목을 베었고 제암리 마을 32가구에 불을 질렀다.
이 사건으로 숨진 사람은 이장 안종후를 비롯하여 남자 21명, 여자 2명이며, 인근 마을 고주리에서도 김상렬 등 6명이 학살당해 불태워졌다. 이같은 만행으로 이날 제암리 일대에는 사람과 가옥, 가축, 곡식, 의류 타는 냄새와 연기가 10여Km 밖까지 퍼져나갔다고 한다. 사건 후에도 일본헌병의 심한 감시로 희생자의 장례조차 치르지 못했으며, 4월 17일 캐나다 의료선교사 스코필드 박사가 유골을 향남면 도이리 공동묘지 입구에 집단 안장했다.
태평양 전쟁 중 일본군의 강제동원 성노예는 20만 명이 넘었다고 하는데 그 중의 대부분이 한반도 출신이었다. 가진 학대를 가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다. 그리고도 강제동원 사실을 부인하며 지금 와서 그 증거를 내놓으라는 뻔뻔스러운 말을 한다. 철면피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조금도 반성할 줄을 모른다.
을사능약으로 우리의 주권을 마비시킨 후 일방적으로 사마네 현에 편입시킨 우리 영토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며 국제사법제판소(ICJ)의 강제관할권 수락을 요구하며 독도 분쟁화를 시도하고 있다. 이것은 명백한 적반하장이다.
차기 집권이 유력시되는 자민당 총재에 당선된 아베 신조 전 총리는 재집권을 할 경우 성노예 강제연행을 인정한 고노 요헤이 전 관방장관의 담화를 수정하고 헌법 9조 평화조항을 폐지하겠다고 언급했다. 서서히 군국주의가 부활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그들의 본 얼굴이다. 시인 릴케는 소설 `말테의 수기`에서 나쁜 이웃은 신체 장애를 일으키는 병균에 비유한다. 개의 콧구멍으로 침입하는 폐렴균처럼 뇌수로까지 파고들어 자신을 끝없이 괴롭히는 게 나쁜 이웃이라고 했다. 그리스 철학자 헤시오도스도 "나쁜 이웃은 큰 불행"이라고 했다. 물론 좋은 이웃도 있다. 그런데 이웃 일본은 우리에게 한 번도 좋은 이웃이 된 일이 없다.
똑같은 제2차 세계대전 전범(戰犯)국가인데도 독일과 일본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독일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스탈린그라드 전투 희생자를 기리는 승전행사에 고위 정치인이 거의 매년 참가한다. 나치는 독일인에게도 적임을 분명히 한다.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는 1970년 12월 7일 폴란드 유태인 희생자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참회했다. 그의 참회의 눈물을 세계인들이 보았다. 브란트 총리는 유럽의 평화가 나치 독일의 유럽 국가에 저질렀던 과오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사죄를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라고 본 것이다.
그런데 일본 정치인들은 패전일인 8월 15일이면 A급 전범의 위패를 합사한 도쿄 야스쿠니 신사에서 고개를 숙이는 자가 적지 않다. 그 앞에선 옛 일본군 복장을 하고 침략을 상징하는 욱일승천기를 든 노인들이 행진을 한다.
독일에서 나치 깃발을 들고 행진한다면 바로 사법처리의 대상이 된다. 홀로코스트(유태인 대학살)를 부정하는 발언을 하거나 글만 써도 처벌한다. 양심의 자유나 표현의 자유라는 변론은 여기엔 적용되지 않는다. 홀로코스트 부정 처벌은 세계적인 규범(global standard)인데, 일본에서는 정치인이 앞장서서 전쟁성노예나 중국의 난징대학살 사건을 부정하는 발언을 계속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은 철저한 탈(脫)나치화를 추구했고, 나치 만행을 자라나는 세대에게 가르치고 있다. 과거 반성을 통해 이웃나라와의 진취적인 미래를 구상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탈군국주의와 과거사 반성, 진실 교육을 거부하고 있다.
독일은 나치 독일의 죄악상을 스스로 속속들이 국민에게 알릴 뿐만 아니라 피해국민들에게 기회 있을 때마다 사죄하고 용서를 빌어왔다. 때문에 독일 국민들은 자기나라 지도자가 남의 나라에 가서 무릎을 꿇고 사과해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일본은 그들이 왜 핵공격까지 받게 되었는지에는 설명이 없이 원폭 피해 상황만 후세들에게 가르쳤다. 침략 행위는 가능한 한 은폐하고 일본의 전쟁 피해에 초점을 맞춰 국민교육을 시켜왔다. 따라서 전후에 태어난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일본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모르거나 왜곡해서 이해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천황이나 지도자가 이웃나라에 사과하고 용서를 비는 일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 결과 독일은 유럽의 지도국가로 거듭났지만 일본은 세계 제3위의 경제 대국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의 지도국가가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9월 23일 도쿄에서 대대적인 반한(反韓) 데모가 벌어졌다. 그것도 태극기의 4괘를 바퀴벌레로 바꿔 그려서 발로 짓밟는 추악한 행동을 감행했다. 미국의 잘못된 전후처리와 일본의 우익화를 용인하는 데 문제가 있다. 독도는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때 일본의 전략적 중요성에 치우쳐 일본에 빌미를 주었고, 중국의 댜오위다오는 미국의 위임관리 하에 있던 것을 1972년 오키나와를 일본에 반환하면서 중국 몰래 끼워 넘겨준 것이다.
지난 7월에 애슈턴 카터 미국방장관이 언론과의 간담회에서 "일본의 증대하는 전략적 이해를 환영한다"고 하면서 "미국지도자들은 일본정부 및 자위대와 협력해 그런 전략의 비전을 실현시키도록 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겠다는 일본의 방침에 미국이 찬성을 했다. 1905년 7월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강점과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강점을 상호간에 묵인하는 가쓰라-테프트 밀약의 망령이 떠오른다.
8·15 해방 후에 "소련에 속지 말고 미국 믿지 말라. 일본X 일어난다. 조선 사람 조심하라"는 말이 널리 퍼졌었다. 소련은 해체되었으니 이제 속을 것도 없다. 북한의 핵위협은 미국의 동아시아 진출의 좋은 구실이 되고 있다. 미국의 진출은 중국의 군비확장과 일본의 대응을 순차적으로 가져오게 된다. 이와 같은 강대국들 사이의 긴장고조는 역설적으로 한반도 남북간의 긴장완화가 절실함을 웅변한다. 남북간의 긴장완화는 정치적 전략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임을 직시해야 한다. "일본X(군국주의) 일어난다. 조선 사람 조심하라." 지난 일을 잊지 않는 것이 나중 일의 스승이 된다(前事之不忘 後事之師也?司馬遷).
(2012.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