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들 땅의 벗 나비야 일본 땅이 얼마나 좋아
챙기 땅의 꽃을 두고 현해탄을 건너더니
조선천지가 해방이 되어도 불귀의 객이 웬 말이냐
대가천 변의 상류에는 `장들`이란 마을이 있고 그 마을 아래로 이십 리를 내려가면 `챙기`라는 마을이 있다. 태평양전쟁이 치열할 때 `장들`마을 총각과 `챙기`마을 처녀가 혼인을 했는데 신혼의 단꿈을 깨기도 전에 신랑이 징용에 끌려가서 8.15 해방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 챙기 땅의 신부는 꼭 나의 셋째 누나처럼 챙기 마을 뒷산에서 일본 땅이 있는 동쪽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색시는 거의 미친 사람처럼 동쪽 하늘만 바라보다가 자작으로 즉흥 노래 하나를 만들어서 불렀다고 한다. 그 노래가 바로 `장들 땅의 벗 나비야…` 노래였다. 얼마 후 그 색시는 자살했는지 어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부모들과 챙기 땅에서 흔적도 없이 없어졌는데 그때부터 성주 서부지방에서는 그 노래가 불린 것이다.
이 노래는 당시 나의 부모님과 후리실 사람들도 알고 있었다. 그날 아침 누나의 그 노래를 들었던 나는 섬뜩했다.
풍문에 챙기 땅의 그 색시가 대가천 어느 소(沼)에 투신자살했다는 말이 떠돌았기 때문이다. 누나는 그 노래를 끝내더니 나에게 부탁 하나를 했다. 누나는 챙기 땅의 그 색시의 마음을 알고도 남겠다면서 내가 크게 되거든 챙기 땅의 색시를 위한 노래비 하나를 세워 주라는 것이다. 그 말이 꼭 누나의 유언 같기도 하고 누나도 그 색시처럼 죽을 수밖에 없다는 뜻 같기도 했다.
나는 그만 울음을 터뜨리면서 "누나야 제발 죽지 마라. 누나가 죽으면 나도 따라 죽을 거야." 하고는 누나의 가슴을 마구 두드렸다.
우리 남매가 뒷동산에서 부둥켜안고 울었던 그날이 마지막 날이 될 줄이야. 3일 후에 누나는 자살을 하고 말았다. 누나의 병을 필사적으로 간호하다가 죽은 자형을 생각하면 재혼을 할 수 없다는 것과 그렇다고 그대로 살기에는 죽은 자형이 그리워서 견딜 수 없다는 유서를 남기고 저 세상으로 간 것이다. 요조숙녀였고 절세가인이었던 나의 셋째 누나는 이렇게 한 많은 24세의 생을 마감한 것이다.
누나가 죽은 지 60여 년이 된다. 나도 이제 지난날보다 앞날이 많지 않기에 그 옛날 고향 땅 뒷동산에 올라가서 누나가 나에게 부탁했던 것을 꼭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노래비를 세우려니 챙기 땅의 그 색시 이름이나 혈친이라도 알아야 되는데 나는 백방으로 수소문해도 아는 사람이 없다. 나는 장들, 챙기 마을을 답사하고 그 마을에서 출향한 사람들에게 전화로 탐문했지만 허사였다.
너무나 안타까워서 성주군 행정기관에 의뢰해서 찾았지만 전혀 찾을 수가 없다. 최후의 수단으로 어느 드라마 작가를 찾아가서 이 이야기를 TV드라마로 만들자고 해서 거의 합의가 되었다가 어떤 사정 때문에 보류 중이기도 하다.
나는 지금도 성주군의 자연부락을 찾아다니면서 이 노래 주인공을 아느냐, 또는 `장들 챙기` 노래를 아느냐고 물어보곤 한다. 이제 나이 많은 사람은 대부분 고인이 되었기에 이 사연 이 노래 아는 사람은 점점 없어지고 말 것이다. 이 노래를 어려서부터 아는 사람은 후리실 마을의 한개댁(이호분 할머니)과 조희택 씨 부부 그리고 챙기 마을에서 대구로 시집온 어느 아주머니 한 분뿐이다.
그래도 나는 단념하지 않고 성주 사람들과 만나면 `장들 챙기` 노래 아느냐, 이 노래 부르다 죽은 여인의 친척이라도 아느냐고 묻는 게 습관처럼 되어 있다. 사람들은 나를 어느 영화 속의 이별한 여인을 찾아서 `누가 이 사람을 아느냐`고 애타게 찾는 북한 인민군 장교 같다고 한다. 나는 누가 무어라 해도 셋째 누나의 유언이기도 한 이 일을 꼭 해내리라. 내가 죽을 때까지 내 영혼을 울리는 문장이 있다면 `장들 챙기…` 노래의 가사다. 내가 그처럼 좋아하는 이조년 선생의 다정가와 한강 정구 선생의 한시 한 편은 후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