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은 TV드라마가 안방 오락시간 중에서 독판을 치고 있지만 3~40년 전만해도 라디오 드라마 시대였다. 라디오 드라마 중 크게 인기가 있는 프로가 방송될 때에는 전국의 주부들이 주방 일을 하다가도 수돗물을 잠그고 그 프로가 끝날 때까지 누가 무어라하던 라디오 앞에서 그 극을 끝까지 청취했으며 그 극이 끝난 후의 주제가까지 듣고서야 다시 주방 일을 하던 때가 아닌가 한다.
그때는 나도 어떤 라디오 연속극에 심취했는데 나는 그 드라마의 사연들에 감동했다기보다는 그 드라마의 시작 전과 끝났을 때 흘러나오는 주제가 중 한 부분이 나의 오장육부를 다 녹일 만큼 슬펐고 감회가 깊었기 때문이었다.
그 주제가 중 "씀바귀 꽃이슬에 떠오르는 눈동자"라는 여가수의 애절하고 구슬픈 가사가 흘러나올 때면 나는 주위의 사람들이 있어도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것은 겨우 스무 살에 폐결핵으로 죽은 나의 넷째 누나의 별명이 씀바귀꽃`이었기 때문이다.
내 위로 누나가 다섯이나 있었는데 8.15 해방 전만해도 우리 집은 산골 농촌에서 중농정도의 토지로 농사를 짓고 살면서 비록 가난했으나 양친 부모 모시고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나 8.15 해방 직후 많은 전염병들이 창궐해서 위로 누나 넷이 폐결핵, 장질부사(장티푸스), 복막염 등 몇 가지 병으로 젊은 나이에 모두 죽었다.
그때 부모님의 통곡소리는 어린 소년이던 내 가슴을 갈기갈기 찢었었다. 아버지는 딸들의 별명을 기가 막히게 잘 지으셨다. 나보다 무려 20세쯤 연상인 제일 큰 누나는 신사임당, 둘째 누나는 황희 정승, 셋째 누나는 서시(西施), 넷째 누나는 씀바구(씀바귀의 내 고향 사투리),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섯째 누나는 장수방구(장수바위의 사투리)다.
큰 누나는 초등학교도 다니지 않았지만 한의원이던 조부님께 한문을 깨워서 한시도 잘 지었고 언어 행동이나 옷 입은 모습이 단정했으며, 삼십 리 밖의 산촌으로 시집갔지만 일편단심 친정 부모님과 동생들의 안위에 몰두했으며 특히 신사임당이 서울에 살면서 친정인 강릉과 부모를 그리워하는 시를 큰 누나가 잘 읊어서 아버지는 큰 누나를 신사임당이라 했다.
둘째 누나는 어떤 사람의 보잘것없는 의사표시에도 반대를 하지 않고 "맞다. 맞다. 네 말이 맞을 것이다."하는 식으로 사람 좋은 여인이기에 아버지는 그 누나를 황희 정승이라 했다. 셋째 누나는 옛날 중국 월나라의 절세미녀 서시처럼 예쁘다고 서시라 했으며, 넷째 누나는 잡초 속에서 자라나는 씀바귀처럼 몸이 허약하고 그래서 꽃잎도 애처롭게 생긴 씀바귀를 닮았다 해서 씀바구라고 이름을 지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섯째 누나는 키는 작은 편이고 몸통도 작은 편이었으나 언어와 행동이 침착했고 입이 무겁기로 마을에서 소문난 여인이었다.
우리 마을 뒤 산기슭에는 집채만 한 바위가 있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그 바위를 장수방구라 했는데 우리 마을 사람들은 바위를 방구라 했었다. 이제 위로 누나 넷은 다 죽고 막내딸인 장수방구만 살았지만 그 누나도 팔십 노인이 되어서 이제는 건망증이 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