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난 내 고향 `후리실`은 행정구역상으로는 경북 성주군 금수면 어른2리이고 고래로 전해 내려오는 속칭 마을 이름은 `후리실` 또는 `후곡리`이다.
내가 수십 년 전에 대구에 나와 살면서 가끔 후리실에 가는데 그 때마다 마을 사람들은 한결같이 나를 반갑게 맞이해 준다. 그 중에도 나를 가까운 친척처럼 유별나게 반겨주는 아주머니가 있는데 그분은 `머지미 아지매` 이다.
머지미 아지매는 친정마을 이름이 `머지미`이기에 택호를 머지미댁이라 하며 따라서 그 아지매의 남편 되는 분은 `머지미 어른`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나는 지금도 머지미 아지매라고 부르지만 이제는 팔십이 넘었기에 호호 할머니이다.
머지미 아지매의 성품이 무던하고 부드러운 여인이어서 누구에게라도 똑같이 친절하게 대하지만 당신의 남편이 나와 같은 배씨 성을 가졌고 그 분하고 내가 호형호제 할 만큼 특별하게 친하게 지내기 때문에 머지미 아지매도 내가 고향에 갈 때마다 한결같이 반갑게 맞이해 준다. 머지미 아지매의 남편과 나와는 같이 성씨이기는 하나 촌수도 없고 그래서 남남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머지미 아지매의 말에 의하면 생판 남남끼리도 친하려고 하는데 배가는 시조도 한 분 뿐이기에 가까운 친척처럼 지내는 게 나쁠 게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고향에 갈 때마다 그 아주머니를 보면 친형수를 대하듯 "머지미 아지매 (또는 머지미 형수) 그간 잘 지냈능교?"라고 하고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면서 악수까지 할 때도 있다.
"이제는 상노인이 되었으니 머지미 아지매가 아니라 머지미 할매라 캐도 안 되겠나?"라며 농담이라도 던질 때면 "지랄한다 할매가 뭐꼬, 내가 백 살이 되어도 병숙이(나의 큰딸) 아부지(아버지)만은 나한테 아지매라 캐라. 늙은 것도 서러운데 시동상(시동생) 같은 병숙이 아부지조차 나한테 할매라 캉깨로 기가찬다 아이가"하고는 격의 없이 나의 어깨를 툭 치기도 한다.
머지미 아지매는 젊은 시절엔 큰 고생을 않고 살았다. 그때는 토지도 제법 많았고 남편인 젊은 머지미 어른이 농사일을 잘해서 그런대로 큰 가난은 겪지 않고 살았다. 그러나 많은 시누이 시동생들을 남혼여취를 시키고 여럿 아들딸들을 공부시키는가 하면 특히 아들 하나는 머리가 총명해서 서울 연세대에 유학을 시키는 등, 그러다 보니 논밭 팔고 소 팔고 종당엔 고래 등 같은 기와집도 팔고 북풍맞이 작은 음달 초가집으로 옮겼을 때는 마을에서 최하위의 빈농으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아들을 서울에 보내서 공부시킬 때는 학비문제로 빚을 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머지미 아지매가 재산보다 부채가 많다는 것을 알고 누구도 선뜻 빌려주지 않았다. 그때의 머지미 아지매의 얼굴은 울상이었다. 삭풍맞이 북향집에서 묵과 두부를 만들어서 성주읍이나 더 멀리 왜관이며 김천까지 머리에 이고 가서 파는 등 머지미 아지매의 고생은 그야말로 목불인견이었다. 그러나 착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전화위복의 행운이 오는가보다.
20년 전 우리마을 후리실 앞으로 국도 30호란 넓은 도로가 개설되고부터는 머지미 아지매의 집에 천사의 따뜻한 손길이 어루만져지기 시작했다.
국도 30호가 머지미 아지매의 보잘것없는 음달집 바로 옆으로 지나가게 될 줄이야!
머지미 아지매는 집 담장에다 `후리실 할매 묵집`이란 간판을 붙여 두고는 묵뿐 아니라 두부며 국수 따위를 팔았는데 머지미 아지매의 시어머니되는 수복할매(택호가 수복댁임)의 묵과 두부 만드는 솜씨가 뛰어났으며 금상첨화로 머지미 아지매가 음식을 특별하게 깨끗하게 차려내기 때문에 그때부터 그 집에는 손님이 넘쳐나서 즐거운 비명을 지르게 되었다.
후리실서 서쪽으로 십 리쯤 가면 낙동강 지류의 하나인 대가천과 성주댐이 있는데 풍광이 절경이다. 국도 30호 도로가 대가천변으로 지나기에 대구를 비롯한 먼 곳에서 관광객이 줄을 잇고 있다.
그 관광객들이 후리실을 지날 때면 꼭 후리실 할매묵집을 들리기 때문에 아침부터 밤중까지 손님들이 만원을 이루고 있다. 수복할매는 3년 전에 백세를 넘기고 세상을 떠났고 머지미 아지매도 팔십 노인이 되었기에 후리실 할매묵집은 문을 닫는 게 아닌 가 했는데 왠걸 머지미 아지매의 대구 살던 딸 순돌이가 친정집 사업을 계승했는데 똑똑하고 친절한 순돌이는 친정 사업을 전에 보다 몇 배 더 번창시키는게 아닌가.
도로를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도 묵집이 생겼으며 덩달아서 그 집에도 묵맛이 있고 그래서 손님이 넘쳐나고 있다. 작년에도 후리실 할매묵집에서 그집 바로 앞에 있는 논을 천여 평이나 샀는가 하면 올해도 근처의 밭과 집까지 사서 이제는 머지미 아지매가 후리실에서 제일 돈을 잘 버는 부자가 된 것이다.
쪼들릴 때는 항시 얼굴이 울상이던 머지미 아지매였는데 이제는 팔십이 넘은 상노인이지만 신나게 묵과 두부를 만들면서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고 할 때 나도 덩달아서 춤이라도 출 듯 머지미 아지매의 행운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고 싶은 것이다.
머지미 아지매의 묵집 영업이 잘되고 보니 나도 행운이 찾아 온 것 같다. 후리실은 비교적 고원지대이고 기온이 낮기 때문에 저 유명한 성주참외도 못 짓는 곳이다. 그래서 수천 평이나 되는 내 밭은 어쩌면 묵혀 둘는지 모르겠다고 했는데 근처의 묵집들이 번창하고 보니 행정 당국에서도 우리 고장을 메밀 재배 지역으로 역점사업을 추진하려고 한다는 소문도 들린다.
이런 말들이 있고 보니 내 밭에 메밀이나 콩을 재배하겠다고 밭을 소작으로 달라는 사람이 여러 번 전화까지 하는 것이다. 전화 대화를 끊은 후 나는 어떤 연극배우가 감동적인 대사를 한 토막 읊듯 환호성을 질렀다.
"아! 사랑하는 내 고향 후리실의 나의 토지 나의 흙에도 메밀꽃이 달빛에 소금을 뿌린 듯 별유세계가 전개 되겠구나."라고 소리친 것이다.
지난번 조상의 산소에 벌초하러 갔을 때 나는 머지미 아지매의 묵집엘 갔었다. 그 때 구십을 바라보는 머지미 아지매가 마치 젊은 여인처럼 허리를 활짝 펴고
"우리 작가아제 벌초하러 왔구나. 오늘이사 아제가 올 줄 알았던지 우리 집 묵과 두부가 기맥히게 잘 맹글어(만들어) 졌다 아이가. 오늘은 내가 아제한테 돈 한 푼 받지 않고 얼마든지 공짜로 줄깅께 두부며 묵하고 동동주를 실컷 묵고 가거래이."
하더니 그 맛좋은 묵을 한 양푼이나 담아 주는가 하면 조금 전에 만든 두부를 뜨뜻한 것으로 세 모나 듬성듬성 썰어서 동동주 한 주전자와 같이 내어 놓았다. 그날 같이 벌초하러 갔던 조카 둘과 그것을 다 먹고 독한 동동주도 다 마셨다. 벌초하느라 땀 흘린 뒤라 그 날의 후리실 할매묵집의 묵과 두부와 동동주는 천하일미였다.
작은 조카는 차를 운전하고 큰 조카와 나는 뒷좌석에 앉아서 대구에 왔는데 나는 그날 머지미 아지매의 행운이 나의 행운만큼이나 대견스러워서 신나게 노래 한 곡조를 부르다가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힘차게 낭독했더니 조카 녀석들도 덩달아 기분이 좋았던지 우리 삼촌 브라보 소리를 치더니 그들도 유행가 한 곡조씩을 부르는 것이었다. 참으로 흥겨운 벌초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