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재순서
1회 불후의 명곡 `나그네 설움` 탄생
2회 친일가수 시비에 휘말리다
3회 형의 죽음으로 심화된 반일정서
4회 의인 박영호와의 운명적인 만남
5회 백년설의 사랑과 결혼
6회 성주고에 노래비와 흉상 건립
7회 자랑스러운 성주인 민족가수 백년설
제2편 친일가수 시비에 휘말리다
앞서 제1편에서는 백년설의 불후의 명곡으로 평가되고 있는 나그네 설움의 탄생 배경을 살펴봤다.작사가 조경환과 함께 밤새 일본경찰의 혹독한 문초에 시달리다가 새벽녘에 풀려나 광화문거리에서 술을 마시고 울분을 달래며 뱉은 말들이 훗날 가사로 탄생했다는 내용이다.
제2편에서는 백년설을 친일가수라고 주장하는 민족문제연구소 및 지역 농민회와 당시 시대상황에 비춰볼 때 일본에 협조할 수밖에 없는 절대적인 이유가 있었다고 항변하는 백년설추모사업 추진위원회의 증언을 토대로 적나라하게 펼쳐졌던 갈등을 살펴본다.【편집자 주】
지역 내에서도 일부 좌파성향 단체에서는 `백년설은 친일가수`라고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으며 백년설추모사업 추진위원회와 지속적인 갈등이 존재해 왔다.
2003년 5월에 있었던 일이다. 백년설추모사업 추진위원회(회장 이상희)가 주최한 제1회 `백년설가요제`가 성주 성밖숲에서 개최됐다. 빗속에 치러진 행사에도 성주군민과 경향각지에서 백년설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러나 행사 시작 전부터 친일이라고 주장하는 단체들로 인해 행사장은 어수선한 분위기가 이어졌으며 급기야 백년설노래비에 오물을 끼얹고 빨간색 페인트칠을 하는 일이 벌어졌다. 전국에서 모인 백년설을 좋아하는 관중들에게 갈등의 현장이 고스란히 노출되고 말았다.
그로 인해 제1회 가요제 행사 후 9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후속 가요제를 열지 못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후 조직적으로 각 방송국에 투서를 보내고 백년설의 노래를 내보내지 말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2009년 10월에는 백년설의 모교인 성주고등학교 교정에 백년설노래비와 흉상이 건립되었다. 그날도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많은 경찰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행사를 진행했지만, 역시 교문 밖에서는 이를 반대하는 시위가 이어졌다.
그러나 흉상 건립 2개월 후 흉상의 얼굴, 어깨 부위 등 20여 곳이 둔기에 훼손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경찰에서는 학교 관계자, 학생, 인근 주민 등을 상대로 탐문수사를 벌이던 중 밤 10시경 학교에 차를 타고 온 용의자 1명의 몽타주를 작성해 추적했다. 성주중고등학교 총동창회에서는 500만 원의 현상금을 내걸었으나 끝내 범인검거에는 실패했다.
백년설추모사업 추진위 관계자는 “누구의 소행인지는 명백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지금까지 범인을 검거하지 못하고 있다. 못 잡는 게 아니라 안 잡는다는 소문이 한동안 떠돌기도 했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창명(본명 백년설)은
친일행위자에서 기각한다”
백년설과 호형호제하면서 당시 같이 활동했던 가수 겸 작사가 반야월 선생이 얼마 전 96세의 일기로 타계했다. 가요사의 산 증인이었던 반야월(본명 박창오, 가수명 진방남) 선생은 생존 시 친일파 운운하는 그들에게 "백년설 선생이 친일이라니! 그가 일제의 최대의 피해자야"라고 일갈했다.
암울했던 시절, 백년설이 노래로 민족의 애환을 달래 준 공적은 묻어둔 채 훼절가수 운운하는 그들을 강하게 질타했다. 그러면서 반야월 선생은 문제의 노래를 백년설이 강압에 의해 부를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생생하게 증언했었다.
1941년 일제는 징병제를 실시하면서 조선인 청년의 지원을 이끌어내기 위해 백년설을 십분 활용하기로 하고 황군신민으로 죽는 것을 찬양하는 내용인 문제의 노래 `아들의 혈서` `혈서지원` 등을 만들어 당시 최고의 사랑을 받고 있는 백년설에게 부르기를 강요했다.
대중가요라는 것이 그 시대 대중과 더불어 숨쉬고, 감정을 조절하는 기능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가요작품을 체제의 선전을 위한 나팔수로 교묘히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백년설은 불이익을 각오하고 못 부르겠다고 버텼다. 끈질긴 회유와 협박에 더는 버티지 못하고 다른 가수들과 1, 2, 3, 4절을 나누어 부른 해프닝만 보더라도 백년설을 친일이라고 덧씌우기에는 언어도단이라고 반야월 선생은 항변했다.
2010년 7월,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의 발표에서 "이창민(백년설)은 친일 행위자에서 기각한다"고 했다. 비로소 백년설이 친일에서 자유로워 진 것이다.
취재1팀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