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김천시 증산면 평촌리 장평(壯坪, 일명 장뜰)과 성주군 금수면 무학2리(일명 챙기; 가천초등학교 무학분교가 있는 마을)의 인물에 의하여 태어난 구전 민요 한 곡이 있다. 증산면 장뜰 마을에서 대가천을 끼고 성주 쪽으로 20리를 내려가면 챙기 마을에 닿는데, 조선시대에는 두 마을 모두가 성주목 증산면에 속하였다.
이 지방에 전하는 전설이 한 가지 있다. 일제시대 장뜰 마을 총각이 챙기 마을로 장가를 갔는데, 초례를 치르고 채 삼일이 아니 되어 일본군에 강제 징발되어 끌려갔다. 어디로 무슨 목적으로 징병되는 지도 모르고 끌려갔다. 장뜰 새신랑은 8.15 해방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영영 다시, 행방도 생사도 알 수 없었다. 색시는 하마나 하마나 신랑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삶을 외롭고 힘들게 보내다 노래를 지어 부르기 시작하였다. 먼 훗날 색시는 자살을 했는지……, 생사여부도 모르게 되고 부모들도 챙기 땅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이 노래는 성주 서부지역에 뿌리를 내리며 연연히 불렸다. 이 민요의 기능 보유자가 부르는 가사를 채록하면 다음과 같다.
장뜰 땅땅 범나비가
챙기 땅땅 꽃을 두고
원수년의 대동아 전쟁에
우리 님을 데려가디
한 번 가신 우리 님은
다시 올 줄 왜 모르노
* 장뜰 챙기가, 기능 보유자 이효분(84세, 경북 성주군 금수면 어은2리 속칭 상후리실 거주)
대동아 전쟁을 배경으로 한 서정민요였다. 점차 민중에 파고들면서 뒷날 부녀자들이 홀치기할 때와 삼을 삼을 때 애창하는 노동요로도 겸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효분(택호; 한개댁) 할머니에 의하면 이 마을 아녀자들이 어려서부터 노동을 하면서 평생 불러오고 있다고 한다.
이제 노래를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고인이 되었고 이효분 할머니를 비롯한 몇 명의 노인들만이 이 민요를 전수하고 있다. 김천에서 성주군 가천면을 향하여 가다가 염속산 살치재를 넘어내려 가서 만나는 삼거리에서 좌회전, 성주군 금수면 후평리 상후리실 마을에 들면 이 민요를 들을 수 있다. 이 마을의 아녀자 몇 명은 지금도 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우리 민족의 뼈아픈 역사와 식민지시대를 힘겹게 거쳐 온 부녀자들의 생애를 전하고 있다. 현 행정구역상 장뜰은 경북 김천시 증산면 평촌리(장평; 壯坪)이며 챙기마을은 성주군 금수면 무학2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