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재순서
1회 불후의 명곡 `나그네 설움` 탄생
2회 친일가수 시비에 휘말리다
3회 형의 죽음으로 심화된 반일정서
4회 의인 박영호와의 운명적인 만남
5회 백년설의 사랑과 결혼
6회 성주고에 노래비와 흉상 건립
7회 자랑스러운 성주인 민족가수 백년설
백년설의 본명은 이갑용(李甲龍)이다. 그러나 사회에 진출하면서 이창민(李昌民 또는 李昌珉)으로 개명했다. 백년설은 그의 예명이다.
이갑룡은 1915년 5월 19일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예산리 414번지에서아버지 이영순과 어머니 김차악 사이에 3남1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집안 형편이 비교적 부유한 편으로 아버지 이영순은 성격이 활달하고 사교적이며 다재다능해 춤도 곧잘 추고 노래도 잘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여행을 좋아하고 신식문물을 동경해 일본과 중국을 여러 차례 다녀와 지인들로부터는 팔방미인으로 통했다.
갑룡은 세 살 때 어머니를 잃고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그는 어릴 때 몸이 몹시 허약하고 편식을 했으며 겁이 많고 자주 투정을 부렸다고 한다. 밤에 화장실을 갈 때도 혼자 못가고 항시 할머니와 함께 갈 정도였다. 그래서 집안사람들은 "저 아이가 커서 제대로 사람구실을 할 수 있을까?" 걱정할 정도였다.
이와 같이 심약한 그의 생활태도는 할머니가 살아있는 동안 계속되었다. 백년설이 초등학교 때 할머니마저 세상을 뜨자 그의 생활태도는 갑자기 180도로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냉수마찰을 하고 맨손체조를 하거나 조깅을 했고, 한밤중에 공동묘지까지 왕복하는 담력훈련도 했다. 그것은 체력을 단련하고 강인한 의지를 다지기 위함이었다.
그가 이때부터 자주 노래를 부르는 습성이 생겼다고 한다. 아마도 늘 의지하고 응석을 받아주던 할머니가 없자 어린 마음에도 큰 충격을 받고 스스로 독립정신을 가져야겠다고 결심한 것 같다.
요주의 인물 청소년 백년설
여섯 살이 되던 1922년 성주공립보통학교에 입학, 1928년에 졸업했다. 재학시절 갑룡은 성격이 온순하고 내성적이었으며 모범학생이었다. 5학년 때까지는 결석 한 번 없이 개근했으나 6학년 때 3일 간 결석을 한 기록이 있다. 학과 성적은 우수하지 못했으나 그림에 소질이 있었고, 노래를 잘 불러 음악은 항상 최고점수인 10점을 받았다.
1929년 열네 살이 되던 해 성주농업보습학교에 입학했는데 당시 이 학교는 2년제 농업학교로 성주군에서는 유일한 중등학교이며, 그 후 성주중학교와 성주농업고등학교, 성주통합고등학교의 전신이다. 당시 그의 학습태도가 보통학교 때와는 너무도 달라 결석도 잦았고, 성적도 최하위권에 머물렀다. 그는 교과과정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오직 문학에 심취해 각종 문학서적을 구해 탐독하는데 열중했고, 또 학생의 신분임에도 대구나 서울에 자주 나다니며 그 곳 문사들과 교류하고 문학서클에도 참여했다. 그러다보니 학교 공부는 자연 등한시되고 지각과 결석을 자주 할 수밖에 없었다.
학교생활에서 또 하나의 특이점은 학생들 가운데 가장 반일(反日)사상이 강했고, 수시로 행동으로 돌출됐다. 한번은 일본인 교사가 우리학생을 구타해 귀가 찢어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에 학생들은 일제히 수업을 거부하자고 주장하기에 이르렀고 이때도 이갑룡이 앞장서서 그 결의를 하게 됐다. 학생들이 그가 앞장서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이 사건과 관련해 이갑룡은 경찰에 연행돼 혹독한 조사를 받았고 여러 날 유치장에 있다가 엄한 훈계를 받고 풀려났다. 이 후 이갑룡은 요주의 인물로 낙인됐고 그의 행동에는 언제나 감시의 눈초리가 따라다녔다.
멘토였던 형의 죽음에 충격
이갑룡은 형제들 중에 중형(仲兄)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듯하다. 중형 혁룡 씨는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진학이 어렵게 되자 가출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누구의 후원을 받았는지는 알려진 게 없으나 와세다대학에서 수학을 한 후 동경에서 인쇄소를 운영했다. 그는 재학시절부터 철두철미한 반일사상을 가지고 독립운동에 참여했으며, 인쇄소 수입의 일부를 독립운동단체에 지원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여러 차례 투옥됐고 마침내 모진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옥사하고 말았다. 멘토라며 따르던 형의 죽음이 갑룡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가 옥사한 사실이 당시 아사히 신문에 보도된 것으로 보아 상당한 반일활동가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가 1941년경으로 추정된다.
시인이며 독립운동가였던 이육사를 혁룡은 몹시 존경했고 따랐는데 두 사람은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1940년대 초에 백년설 부부는 등산길에서 우연히 육사를 만났다. 육사는 백년설을 알아보고 형인 이혁룡의 안부를 물었고, 그의 옥사 소식을 듣고는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가 있다. 이날 육사는 시를 좋아했던 백년설의 부인 이한옥에게 미발표 시 몇 편을 선물로 주었는데, 그 후 관리 잘못으로 분실해 이한옥은 늘 이를 아쉽게 여겼다.
갑룡에게는 형 혁룡이 선망의 대상이었고, 갑룡이 유학을 간절히 원했던 것도 혁룡의 영향이 컸다. 문학에 심취한 것도 형의 영향을 받은 것이고 중학생의 신분임에도 대구와 서울에 있는 문사들과 교류할 수 있게 된 것도 형의 중계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4촌형을 보며 가수의 꿈을 꾸다
백년설이 훗날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가수로 우뚝 서는데 크게 영향을 끼친 또 한사람이 있다. 그가 4촌형인 이종출 씨다. 종출은 일본 동경에 있는 우에노(上野) 음악학교에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입학을 했다.
당시 이 학교는 학장과 교수의 대부분이 독일인과 이태리인이었는데 종출은 여기에서 바이올린을 공부했다. 방학 때 귀국하면 갑룡은 그로부터 서양음악과 서양문물에 관해 밤을 새우다시피 해가며 들었다. 이갑룡은 원래 그의 부친을 닮아 음악에 소질이 있어 노래를 잘 불렀지만 정규음악이란 차원에서 노래를 생각한 것은 순전히 이종출의 영향이었다.
두 사람의 영향으로 갑룡은 더 넓은 세계에서 활동할 수 있는 무대가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 곳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그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동경으로 가는 것이 목표였지만 일단 서울로 먼저 가기로 결심하고 가족과 상의한 후 문학가로서의 원대한 꿈을 안은 채 성주를 떠났다.
서울생활을 하던 어느 날 이창민은 작곡가인 홍난파 선생을 찾았다. 우리나라의 가곡, 특히 동요에 대해서도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홍난파에게 음악의 지도를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의도에서였다. 홍난파는 그에게 여러 가지를 물어본 뒤에 "가곡이나 대중가요를 구태여 구분할 필요가 없으므로 차라리 대중가요를 해보라"고 권했다. 이 말을 들은 이창민은 몹시 기분이 상하고 낙담을 했다고 한다.
그 후 그는 당대의 성악가 안기영에게 레슨을 받았다. 안기영은 그가 노래보다 작사에 소질이 뛰어난 것을 보고 콜롬비아레코드사 문예부에 소개했다. 문예부에서 작가생활을 시작했으나 그에게는 작가보다는 가수로서의 재능이 꽃필 수 있는 계기가 우연찮게 다가왔다.
취재1팀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