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여 년 전, 장학금은 턱없이 부족했고 일할 곳을 찾기란 장학금을 받기보다 어려웠다. 돈을 버는 일은 곤욕스러웠고, 그러면서 공부를 하는 일은 고통이었다. 그래서 고학이라 했는지 모른다. 지금은 고학이란 말이 사라졌다. 정부에서 기업에서 동창회에서 장학금은 쏟아진다. `일`에 해당하는 독일어 아르바이트란 말을 누구나 알게 되었고 그만큼이나 시간제 일자리는 많아졌다. 회사, 공장, 백화점, 학원, 식당 등 아르바이트가 가능하지 않는 곳을 찾기가 더 어렵다. 다른 나라는 어떨까? 미국의 경우 열여덟 살이 되면 경제적으로 부모로부터 독립을 한다. 고등학교를 마치면 부모와 한집에 살아도 생활비를 내야하고 대학을 가면 학비는 스스로 조달해야 한다. 이것은 일종의 불문율이다. 비록 우리나라의 대학에 장학금이 많아지고 아르바이트할 곳이 많아졌다하더라도 대학생이 재정적으로 독립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하물며 60년 전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1952년 봄, 서울대학교에 입학하여 수원캠퍼스에서 대학생의 꿈을 펴나가기 시작했다. 얼마동안 자취도 해보고 하숙도 해보았으나 홀로서기 정신으로 대학공부를 하겠다는 나에게 쉬 풀리는 일은 없었다. 4월의 어느 날, 학생들로부터 존경을 받으시던 고 지영린 교수님께 편지를 드렸다. 만나 뵙고서 말씀드릴 용기가 없어서 이렇게 글로 쓰게 되었으니 양해해 달라고 쓴 다음 가정형편이 어려운 것도 사실이지만 혼자 학비를 벌어서 공부를 하고 싶다고..., 그래서 우리나라 농학분야를 이끌어갈 차세대 지도자가 되고 싶다고..., 어떤 난관과 시련이 있어도 공부하는 일은 포기할 수 없으니 캠퍼스 건물 청소부 일도 좋고 농장일도 좋으니 학비를 조달할 수 있는 일거리를 주십시오라고 간곡히 부탁을 드렸다. 며칠 후 지 교수님께서 나를 부르셨다. 하지만 기대했던 일자리는 없다는 말부터 먼저 하시는 것이었다. 우리 대학교가 국립대학교인지라 용원이나 청소부까지 다 기능직 공무원인데 학생은 공무원이 될 수 없도록 법에 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시면서 학내 L교수와 Y교수에게 한 군을 가정교사로 입주할 수 있도록 부탁해 놓았다는 자상한 말씀을 해 주시는 것이었다. 사실 이 일이 인연이 되어 대학을 다니는 동안 나는 L교수댁에서 1년간, Y교수댁에서 1년간 총 2년여의 입주형 가정교사 생활을 하였다. 등록금은 당시 대학이 지급하던 얼마 안 되는 장학금을 받아 해결하였고. 한편 학부 3학년 때부터 약 1년 반 동안 실험목장 부화실 조수로 일을 하면서 식사와 잠자리 문제를 다 해결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4년 동안의 대학생활은 끝이 나게 되었다. 졸업과 동시에 대학원에 입학하는 기쁨과 함께 졸업을 앞두고 제1회 고등고시 기술과에 합격하는 영광도 안을 수 있었다. 나의 고학으로 끝낸 대학생활 중 고향 성주에서 있었던 일 두 가지를 여기서 꼭 언급하고 싶다. 그 하나는 내가 3학년 겨울방학 때 고향을 가면 스스로 개발한 영어교재를 성주고등학교 후배들에게 판매하였다. 물론 그때 후배들에게 영어를 가르치셨던 이재곤 선생님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이 일은 불가능하였으리라. 등사판에 밀어서 제작한 300여 부의 영어교재를 후배들이 한 부도 남김없이 다 팔아 주었던 것이다. 너무나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중에 들은 얘기인데 후배들이 고학하는 선배의 어려운 얘기를 듣고 전부 팔아주기로 결정하였다는 후문이었다. 이 일이 나의 학비보조에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또 한 가지 일은 초전초등학교를 같이 다닌 김판용 군이 주선한 일이었다. 역시 대학 3학년 겨울방학 때의 일이었다. 김 군이 어느 날 저녁에 나를 불러내어 동네 술집에 데려갔다. 그 자리는 저와 나, 단둘이서 식사를 하는 그런 자리였다. 한 사람의 접대부(기생)가 동석을 하고 있었지만 한참 세상 이야기가 오고 간 다음에 갑자기 김 군이 나에게 이런 제의를 하는 것이었다. 동석한 이 P양이 자네의 나머지 대학생활에 필요한 학비를 대주겠다고 하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이다. 내 대학생활의 나머지 1년간의 학비란 요즈음 돈으로 말하자면 거의 2,000만원에 이르는 돈이다. 그 많은 돈을 P양이 실제로 부담하기란 어려운 일이기도 하였을 것이며, 그런 부담스러운 호의를 받을 그런 연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무엇보다 나는 이미 홀로서기 정신으로 무장되어 있었고, 그러한 삶이 가능함을 알고 있었기에 단호히 거절할 수 있었다. 그 때 만약 내가 조금 편히 지내겠다고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어쩌면 그렇게 독하게 공부를 하지 못하였을 지도 모른다. 그 호의를 마음만으로 받아둔 것은 더 없이 현명한 일이었다. (2006. 10. 12)
최종편집:2025-07-09 오전 11:47:42
최신뉴스
트위터페이스북밴드카카오톡네이버블로그URL복사
이름 비밀번호
개인정보 유출, 권리침해, 욕설 및 특정지역 정치적 견해를 비하하는 내용을 게시할 경우 이용약관 및 관련 법률에 의해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유튜브페이스북포스트인스타제보
PDF 지면보기
오늘 주간 월간
출향인소식
제호 : 성주신문주소 : 경북 성주군 성주읍 성주읍3길 15 사업자등록번호 : 510-81-11658 등록(발행)일자 : 2002년 1월 4일
청소년보호책임자 : 최성고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 경북 다-01245 개인정보관리책임자 : 최성고e-mail : sjnews1@naver.com
Tel : 054-933-5675 팩스 : 054-933-3161
Copyright 성주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