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체의 주기적 현상에 따라 시간 단위를 정하는 체계를 역(曆)이라고 한다. 역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양력, 태음태양력(음력), 절기력이다. 양력은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주기를 기준으로 한 것이고, 음력은 달이 차고 기우는 주기가 기준인 순태음력에 윤달을 넣어 계절의 변화를 맞춘 것이다. 그리고 절기력은 태양의 위치를 기준으로 한 역으로, 1년을 입춘(立春)·우수(雨水)···소한(小寒)·대한(大寒) 등 24절기로 나누어 4계절의 변화를 가장 잘 나타낼 수 있어 농경사회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도구였다.
동양에서는 시간 단위를 표시하기 위해 10천간(天干)과 12지지(地支)를 이용해왔다. 하늘의 기운 변화를 나타내는 甲·乙·丙·丁·戊·己·庚·辛·壬·癸의 10개 천간과 땅의 기운 흐름을 문자화한 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의 12개 지지를 차례대로 짝지으면 甲子·乙丑····壬戌·癸亥 등 60개가 된다. 2013년 계사(癸巳)년도 60갑자의 하나이다. 연(年)으로 따지면 간지(干支)가 같은 해는 늘 60년 만에 다시 온다.
12지지는 12가지 동물을 상징한다. 쥐(子)·소(丑)·범(寅)·토끼(卯)·용(辰)·뱀(巳)·말(午)·양(未)·원숭이(申)·닭(酉)·개(戌)·돼지(亥)이다. 그 지지의 해에 태어나면 그 동물 이름의 띠가 붙여진다.
10천간은 木·火·土·金·水의 오행(五行)으로 나뉘고, 木(甲·乙)에는 청색, 火(丙·丁)에는 적색, 土(戊·己)에는 황색, 金(庚·辛)에는 백색, 水(壬·癸)에는 흑색이 배속된다. 지난 임진(壬辰)년의 壬과 올해 계사년의 癸는 오행으로 水이므로 지난해는 흑룡(黑龍)의 해, 올해는 흑사(黑蛇)의 해로 부른다.
올해를 상징하는 흑사, 즉 검은뱀은 영물(靈物)로 여겨진다. 그러나 대부분 뱀에 대한 기억은 그다지 좋지 않다. 생김새도 징그러운 데다 독까지 품고 있고, 민담이나 설화에 등장하는 뱀은 거의 복수의 화신으로 등장한다. 특히 아담과 이브에 등장하는 뱀은 인간을 낙원으로부터 쫓겨나게 한 사악한 동물로 그려지고 있다.
어렸을 때 주일학교 선생님이 "뱀은 인류의 원수이기 때문에 보이는 대로 죽여야 한다. 뱀을 천 마리 죽이면 천당 간다"는 말을 듣고 뱀이 보이기만 하면 끝까지 따라가서 돌로 쳐죽였다. 그러나 때로는 뱀이 너무 빨리 달아나 숨어버리기 때문에 놓치는 수도 있었다. 그것을 보고 있던 동무들이 뱀은 복수심이 강한 동물이기 때문에 일단 건드리면 아주 죽여 버려야지,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꼭 보복을 당한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는 돌에 맞고 달아났던 뱀이 나타나 내 몸을 칭칭 감고는 입을 벌리고 달려드는 꿈을 꾼 일이 있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뱀이 달아나 숨을 여지가 있는 곳에서는 아예 뱀을 건드리지 않았다.
올 한 해도 뱀처럼 굴곡지고 캄캄한 터널을 지나야 한다는 예측이 나오는 것은 뱀의 이러한 부정적인 면 때문일까? 그러나 뱀은 이런 면과는 정반대로, 겨울에 사라졌다가 봄이면 다시 나타나기에 재생과 치유, 영생의 상징으로, 풍요와 다산(多産), 지혜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성경에서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뱀과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가르쳤고, 용비어천가에서는 뱀을 풍요와 번영의 상징으로 묘사했다. 뱀에 물리는 꿈이나 접촉한 꿈을 꾸면 재수와 재물이 따르는 좋은 꿈으로 해석된다. 두뇌가 명석하며, 지혜와 지식을 겸비하고, 한번 마음먹으면 끝까지 파고드는 뱀띠 인재들이 적지 않다.
60년 전 계사년인 1953년에는 6·25 휴전이 성립되었고, 새천년의 첫해(辛巳年)도 뱀의 해였다. 그 당시에 품었던 기대와 우려가 새롭다. 치열했던 선거만큼이나 해결해야 할 많은 과제를 안고 새정부가 출발한다. 경제위기, 세대·계층·이념의 갈등, 성장과 분배의 조화 등 국내적 과제뿐만 아니라, 동북아 안보 또한 급변하고 있는 상황에서 뱀처럼 지혜롭게 대처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면 영물스러운 뱀의 해가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복수의 해`가 될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60년 전 계사년에 휴전이 되었지만 아직도 평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이 한반도에 절망의 검은 구름이 걷히고 평화와 통일의 서광이 비치는 새천년 첫 계사년이 되기를 소망한다.
겨울을 보내고 허물을 벗은 뱀은 제 허물이라도 벗은 허물을 다시 껴입을 수 없다. 뱀띠 새해를 맞으며 지난해는 벗어버린 시간의 허물이 되었다. 삶은 늘 시간의 허물을 벗어 새로운 시간의 물결을 알몸으로 맞는다. 지난 시간의 허물이 벗겨질 때, 허물에 켜켜이 쌓인 절망·원망·후회·자책·한숨도 다 쓸려나가야 한다. 뱀이 허물을 벗듯, 아쉬움도 아픔도 다 함께 벗어버리자. 그리고 개구리를 쫓는 들뱀처럼 활력 있고, 넓은 못의 물결을 휘젓는 물뱀 같이 자유로운 한 해를 살자.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불뱀에게 물려 모두 죽게 되었을 때, 모세로 하여금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게 해서 그것을 쳐다본 사람은 다 낫게 한 것처럼, 60년 만에 다시 찾아온 검은뱀이 놋뱀 되게 하셔서 불뱀에 물려 고통 받는 이 민족의 상처를 치료해 주옵소서. 아멘!" (201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