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신문을 읽는 이유는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인간의 삶에 무엇이 유용하고 해로운지, 공동체적 가치추구를 위해
내가 무엇을 해야하는지 알기 위해서다.
이것을 소위 ‘알권리’라고 하며, 신문은 바로 독자의 ‘알권리’
충족을 위해 존재한다. 이를 위해 무소불위의 권력에 저항하고
이해 당사자의 비난을 감수하며 오직 사명감 하나로 ‘세상 바로 알리기’에
정열을 불태운다.
이런 언론의 정열은 인간문명 발달에 크게 기여했다. 아니 선도했다고 할 수 있다.
세계 최고 부자인 빌 게이츠는 “컴퓨터의 발달로 종이가 필요 없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예언했다. 하지만 그는 “컴퓨터가 아무리
발달해도 종이매체를 능가하지 못할 것”이라고 번복했다.
그 이유는 종이 소비량이 갈수록 오히려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며,
컴퓨터에 담긴 정보는 신속성은 있으나 인간의 감성을 충족시키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는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사회에 자랑할 만한 신문매체가 있다는 것은
곧 주민의 긍지다. 우리의 공동체적 사회를 더욱 풍요롭고 원만하게 만들며
모두가 참여하는 민주주의를 꽃피우게 만들기 때문이다.
자랑할 만한 신문매체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민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으로 애정과 질책, 참여와 호응은 신문을 만드는
기자들을 신나게 만들고 보람과 책임감을 키워준다.
외국에는 전국지 보다 지역신문이 훨씬 더 영향력이 크고
지역 주민들의 사랑과 활발한 참여 속에 미래발전을 선도하거나
유도하는 소위 ‘주민의 매체’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관심도 애정도 참여도 호응도 없는, 한마디로 설은 있어도 행동은 없다.
저마다 목소리는 큰데 공론화 노력과 그럴듯한 시민단체 하나 찾기 어렵다.
이해가 걸린 문제는 거품을 물고 달려들지만 그렇지 않는 일은
강 건너 불 구경하듯 한다.
어른들은 방관하고 공공요원은 안일하며, 지도자들은 현실에 안주해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이 부족하고 추진력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상태다.
한마디로 성주호는 구심점 없이 시류에 따라 그저 흘러갈 뿐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스스로 만들어 가야한다. 방관과 침묵,
이해득실에만 몰입하면 경쟁에서 이기지도 못하고 미래도 없다.
군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질책만이 성숙한 시민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다.
그래야 ‘알권리’충족을 위한 신문도 힘이 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