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심점이란 중심적 역할을 하는 사람·단체·사상(비전) 따위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어떤 사회 구성원 또는 조직이 달성하고자하는 목표를 향해 제대로 굴러가기 위해서는 중심적 역할을 하는 사람·단체·사상(비전) 등이 버티고 있어야 큰 성과를 낼 수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과거 박정희 정권시절 ‘잘 살아 보자’는 한마디로 전 국민의 단결과 근로의욕을 불러일으킨 사실은 오늘날 국가 위상과 부를 축적한 단초가 된 좋은 본보기다. 모두가 소망하는 명쾌한 목표를 내걸고 소위 ‘새마을운동’으로 하나되게 했다. 뼈 빠지게 고생스러워도 희망이 있었기에 모두가 힘든 줄 몰랐고 오히려 신명나 있었다. 구심적 역할이 왜 필요한지, 얼마나 중요한지를 단적으로 대변하는 대목이다.
우리 성주사회는 과연 구심점이 있는가. 결론은 ‘그렇다’고 자신 있게 답변하기 어렵다.
우선 사람을 보자. 군민들은 자신의 영민함을 과신해 남을 깔보고 업신여김은 일상화 돼있고 탐욕이 지나쳐 배려, 단합, 인화 등은 거론하기조차 힘겨운 상태다. 명망 있고 사회여론을 주도할 수 있는 인사들은 공동생활체의 미래를 생각하기보다는 자신의 사리사욕에 매몰돼 있다. 지위를 얻고자 얼굴 알리기에만 급급해 명망에 걸맞은 지도자 역할은 뒷전이다.
예를 들면 다단계 피해는 불을 보듯 뻔한데 지도층은 침묵했다. 아니 경고나 설득은 고사하고 일부 공직자나 금융기관 책임자들이 앞장서 투자함으로써 다단계 광풍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고 아니할 수 없다.
각종 단체들의 성향도 별반 다르지 않다. 70여개에 이르는 사회단체가 있지만 올바른 역할을 하는 단체는 다섯 손가락도 남을 정도다. 쥐꼬리만한 보조금에 연연해 공익을 위한 목소리 한번 내지 못한다. 마지못해 전시성 행사나 봉사활동 흉내만 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니 세(勢) 규합해 특정인 욕심 채워주는 뒷배 역할 한다는 비아냥거림도 듣게되는 것이다.
사상(비전)문제에 이르면 더욱 답답하다. 우리 사회에 과연 미래지향적 비전이나 메시지가 있는가. 거론된 다수의 목표들이 있지만 군민들을 하나로 묶어 낼 구심점 역할을 하기에는 미약하다. ‘잘 살아 보자’와 ‘살기 좋은 성주 건설’은 의미도 부추김에 있어서도 차이가 크다.
지역사회 발전은 구성원 모두가 공감하고 적극 호응할 수 있는 비전과 구성원들의 욕구를 한곳으로 결집시킬 수 있는 지도자의 구심점 역할이 요체다. 기축년을 코앞에 둔 지금 미래를 내다보는 깊은 성찰이 필요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