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매도 날히언마라난 낟가티 들 리도 업스니이다 아바님도 어이어신마라난 위 덩더둥셩 어마님가티 괴시리 업세라 아소 님하 어마님가티 괴시리 업세라 "호미도 날이지마는 낫처럼 들 까닭이 없습니다 아버지도 어버이시지만 어머님같이 나를 사랑하실 분이 없도다 어 말씀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이여 어머님같이 사랑하실 분이 없도다" 이 작품은 작자 미상의 고려가요라고 하거니와 부모님 중 아버지의 사랑이 아무리 크다고 하나 어머니의 사랑에는 못 미친다는 뜻이리라. 그래서 작품명도 사모곡(思母曲)이라고 한 것이리라. 그것은 어쩌면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이 세상 부모들 중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있으련만 그래도 어머니가 자식에게 쏟는 사랑이 아버지보다 더 따뜻하고 더 집요하고 더 자애롭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견해일 것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것을 전폭 수긍할 수가 없다. 나의 부모님도 이 세상 많은 어버이들처럼 자식에 대한 사랑은 생명적이었지만 그 중 나의 아버지의 자식사랑은 어떤 언어로도 글로도 표현할 수 없이 핏빛처럼 붉고 불꽃처럼 뜨거웠다. 내가 출생한 곳은 경북 성주땅의 끝자락에 있는 산골농촌 마을인데 마을 이름은 속칭 후리실이라고 한다. 마을 형상이 마치 삼태기처럼 생겼다. 얕은 산능선이 활처럼 둘러싸인 곳에 50여호의 농가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이다. 약 백 년전만 해도 우리집은 송곳 꼽을 땅 한 평 없어서 초근목피로 겨우 생명을 유지했던 극빈가였다. 조부께서는 아들을 4형제 두셨는데 아버지는 그 중에 둘째 아들이었다. 백부님과 아버지 밑으로 삼촌 두 분은 농사가 싫다고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군서기 또는 면 직원 등 하급이지만 관계로 진출했다. 그 시대에는 보통학교만 졸업해도 영리한 사람은 말단 관리로 취직했던 때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일제의 하수인 노릇은 죽어도 싫다면서 타인의 토지 몇 두락을 소작하면서 조부모님을 모시고 후리실에서 살았다. 천우신조였을까. 영특한 조부께서는 성주읍에 있는 어느 한의원에서 급사 비슷한 일을 해주면서 틈틈이 한의술을 배웠는데 뒷날 우리마을 후리실에서 한의원을 개설했다. 가운이 트이기 시작했던지 조부님의 타고난 능력 대문이던지 조부님의 한의술이 영험이 있다고 인근 주민은 물론이고 먼 곳의 사람들도 우리집 한의원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조부님은 나병도 고칠 수 있는 의술을 가졌었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 같지만 그 시절엔 한의대를 졸업하지 않아도 어느 한의원에서 견습한 노력만 해도 한의원을 개설할 수가 있던 때였다. 가운이 번창해 질려니 조부님께서 한의술로 번 돈을 둘째 아들인 아버지가 요즘말로 재테크 능력을 귀신처럼 발휘해서 재산이 날마다 불꽃처럼 융성해졌다. 아버지는 조부께서 번 돈과 그 시대 금융조합(지금의 농협 비슷한 기관)에서 융자를 받아서 토지를 사기 시작했다. 그 토지에서 생산된 쌀을 양식할 만큼만 두고 모두 팔아서 토지를 사고...... 조부님 한의술 사업도 점점 번성해지는 등 우리집은 아버지의 연세가 30을 넘어갈 무렵엔 도조(소작료) 200석을 받는 부자가 된 것이다. 그 시대엔 먼 곳에 있는 토지를 사서 타인에게 얼마든지 소작을 경작하게 할 수 있는 때여서 아버지는 후리실은 물론이고 성주읍 또는 김천, 고령에 있는 비옥한 토지를 사서 소작으로 경작하게 준 것이다. 우리집안 가운을 융성시킨 일등공신인 둘째 아들인 아버지를 조부께서 특별하게 아끼시고 아버지를 혼인시켜서 분가를 시킬 때는 일등효답이란 논 백두락과 대지 300여 평이나 되는 큰 집을 마을 복판에 지어서 물려주신 것이다. 아버지가 열 살, 어머니가 열두 살 때 혼인을 했으니 그야말로 동화 같은 시절의 이야기라 하겠다. 분가를 아버지가 스무살 때 했으나 부모님은 큰집에서 조부님과 한 집에 살다시피 했으며 아버지는 여전히 대소사 살림살이를 총괄했다. 아버지가 백 두락의 땅을 분재 받은 것은 서른 이후였고 그때도 부모님은 분가를 해도 큰집에서 조부모님을 모시고 같이 살다시피 했다. 나의 부모님은 신혼시절부터 금슬이 좋았으며 아버지가 18세, 어머니가 20세 때 첫 딸을 낳고 2년 후에 또 딸을 낳았다. 딸들을 연달아 낳고 보니 조부모님은 섭섭해 했으나 아버지는 반대였다. 딸이 더 귀엽고 더 사랑스럽다며 금이야 옥이야하고 두 딸을 사랑했다. 누나들의 이름도 한문을 아는 아버지께서 지었는데 큰 누나는 비취, 둘째 누나는 산호라는 예쁜 이름을 지었다. 어머니가 딸들 중 하나는 아들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면 아버지는 어머니께 핀잔을 주었다. 딸만 열이라도 좋으니 건강하고 예쁜 딸을 얼마든지 낳으라고 했다. 아버지는 들에 갈 때도 바지개(지게 위에 얹어 놓고 물건을 담는 싸리로 만든 기구)에 어린 두 딸을 싣고는 아버지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간다"라는 민요를 부르며 춤을 추듯 들길을 걸어갔다. 누나들도 아버지 따라서 그 노래를 부르고 좋아했다. 그래서 누나들은 어머니보단 아버지를 더 좋아했다. 흔히 사람들은 엄부자모(엄한 아버지 자애로운 어머니)라고 하지만 우리집은 자부엄모라고 하는 게 맞을 거라고 뒷날 삼촌들이 말했다. 어머니는 딸들에게 엄했다.
최종편집:2025-07-09 오후 05:4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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