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중반에 민주화의 물결이 넘실거리면서 이 땅에 권위주의가 서서히 사라지고 있던 때의 일이다. 대학가에도 이러한 변혁이 스며들면서 총학장을 교수들의 직접투표로 결정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은 임명제하에서라면 꿈도 못 꾸었을 터인데 1989년에 초대 민선학장으로 선출되는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물론 교수들은 수원캠퍼스의 관악으로의 이전사업과 낡은 연구용기기의 대량 구입이라는 어렵고 중차대한 과제를 임기 2년의 학장직을 맡은 나에게 맡긴 것이다. 그 후 두어 차례 학장선거가 더 있고 난 다음 1995년 학장선거 때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 벌어졌다.
K교수가 2년 선배인 C교수와 함께 학장 선거운동에 뛰어들면서 선거가 경선으로 이어졌다. 이 두 사람은 같은 학내 써클인 수요모임의 형제요, 같은 교회를 다니는 평소에 아주 절친하게 지내는 사이였다. 학내 교수들의 반응도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그래도 이 두 사람은 서로 양보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친구들은 나에게 중재를 당부하면서 후보단일화를 강력하게 요청하였다. 내가 나선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하는 수 없이 두 사람을 내 교수실로 불러 놓고 이른바 후보단일화를 위한 절충작업을 시도해 보았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후보단일화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C교수도 K교수도 이번이 마지막 기회이니 끝까지 해 보겠다고 하면서 서로 상대방이 양보하기를 요구하였다. 두 시간 넘게 벌어진 후보단일화 협상은 물거품이 되고 나는 두 사람에게 페어플레이를 할 것과 1차 투표에서 어느 한 사람이 뜻을 이루지 못하면 2차 투표에서는 다른 한사람을 지지해 주도록 약속을 받는 선에서 논의를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나의 마음이 허전하여 그날 저녁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였던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학장선거를 하던 날 우리 몇몇 노교수들은 그를 밀어 주었지만 C교수는 결국 1차 투표에서 큰 표 차이로 학장직에 대한 꿈을 접어야 했다. 다른 교수들이 말하는 그의 패인은 성격이 너무 온화하고 자상한 데 비하여 대학 발전을 위한 뚜렷한 신념이나 비전이 없을뿐더러 업무 추진력이 모자라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미 약속 했던 대로 우리 원로교수들은 2차 투표에서는 모두 K교수를 밀었고 캠퍼스 이전파라고 알려진 그는 당선의 영광을 안게 되었다. 사실 그때 학장선거는 언제나 이전파와 비이전파의 대결이었고 한동안 이전파 후보가 언제나 학장으로 당선되었던 것이다.
이 선거결과로 자존심이 상한 C교수가 어느 날 나를 찾아와 자기는 더 이상 이 대학에 몸을 담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옆에 있는 농업전문학교 교장으로 가고 싶다고 말하였다. 그러지 말라고 강력하게 만류를 하였으나 막무가내였다. 그로부터 몇 달 후 그는 그 학교로 옮겼고 우리 대학과는 아주 인연을 끊고 말았다. 우리 원로교수 몇 사람이 그를 찾아가 위로하고 낙심치 말라고 충고하고 싶었으나, 그는 우리가 전화로 만날 것을 요청하면 언제나 출장 간다, 강의를 해야 한다면서 끝내 만나 주지를 않았다.
그 이듬해 봄에 C교수가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무에게도 그의 와병사실을 알리지 말라는 엄한 분부까지 내렸다는 것이다. 주위 여러 선후배들이 나에게 문병을 다녀올 것을 부탁하였다. 그래서 어느 날 그의 병실로 찾아갔다.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다짜고짜 어떻게 알고 왔느냐며 역정을 냈다. 별 대화도 없이 조속히 쾌유하기를 빈다는 말을 남기고 그의 병실을 총총히 빠져나왔다. 그로부터 몇 주 안 지나서 그는 우리와 영영 이별하게 되었고 나는 다시 그 병원 영안실로 이번에는 문상을 가게 되었다. 그가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여 병을 얻었는지 아니면 거꾸로 병을 다스리지 못하여 마음이 완악해 졌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학장직을 잘 마친 K교수도 학장직을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위암 수술 차 입원을 했다.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서인지 그 후 5년가량 정상적으로 교수생활을 잘 영위하였고 만 65세가 되어 교수직 정년퇴임식까지 잘 마쳤다. 그가 학교를 떠난 후 얼마 안 되어 지병이 재발하여 다시 입원을 하게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이번에도 나는 문병을 가서 조속한 쾌유를 기도하고 왔다. 퇴원 후 다시 몇 달이 지난 후 2007년도 1월 초에 그의 병이 악화되어 이번에는 세브란스병원 암병동에 입원하게 되었다. 즉시 달려가서 K교수의 모습을 보니 이미 그는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보지도 못하는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이번에도 다시 그의 쾌유를 비는 간절한 기도를 남기고 그의 병실을 떠났다. 그로부터 나흘 후 K교수도 불귀의 인생이 되고야 말았다.
C교수가 먼저 죽고 K교수도 몇 해 후에 따라서 죽고 말았다. 두 사람 다 60은 넘겼으나 70은 넘기지 못한 채 나그네 인생을 마무리하고 말았다. 그럴 것인데 왜 두 사람은 목숨을 걸고 아옹다옹 했던 것일까? 한 대학의 학장자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이길래 말이다.
미워하는 마음을 사랑으로, 잘못한 행동을 용서로 바꾸었더라면 하는 평범한 삶의 교훈을 남기고 두 사람은 모두 불지의 객이 되었다. 어쨌든 우리 모두는 언젠가 허망한 이 세상을 떠난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살아야 할 것이다. 그 두 사람은 죽은 후에 모두 같은 교회 묘지로 갔으니 거기서나마 서로 화해하기를 비는 마음 간절하다(2007. 1.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