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그 시대 사람인 아버지도 남아선호 관념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세 번째로 어머님이 잉태했을 때 아버지는 어머니가 아들을 낳게 해 달라고 천지신명께 기구까지 했다는 것을 마을사람들이 말했다. 그런 아버지께 천지신명은 아들 하나를 선물한 것이다.
겨우 스무 살을 조금 넘긴 아버지는 득남하던 날 얼마나 좋았던지 마을의 이 골목 저 골목을 토끼처럼 뛰어다니면서 우리 마누라 고추 낳았다고 소리치며 자랑을 했었다. 이백석꾼 배부자 배약국 둘째 아들이 득남을 했다고 후리실 마을 사람들은 설사 속마음은 그렇지 않더라도 자기들의 경사처럼 기뻐하고 축하를 했다. 대부분 우리집 토지를 소작하는 마을 사람들이기에 그 시대 지주는 소작인에게는 절대 군주 같은 존재여서 그렇게 겉마음으로라도 축하춤을 추었을 것이다.
그 때 태어난 아들이 살았다면 나보다 열두 살 연상이다. 뒷날 마을사람들이나 숙모들의 말에 의하면 형은 깎아 놓은 알밤처럼 예뻤고 총기가 있고 노래도 잘하고 똑똑했다고 했다. 그런 형이었으니 아버지의 형에 대한 사랑은 최절정이 아니겠는가.
대지가 300여 평이나 되는 우리집이고 보니 마당도 운동장만큼 넓었다. 아버지는 딸 둘, 아들 하나를 하늘의 별에 비유했는데 별 중에도 큰 별에 비유했다. 가을 또는 초겨울 이른 아침 동쪽하늘과 북쪽 하늘과 서쪽하늘에는 특별하게 큰 별이 하나씩 빛나고 있다. 그 별들 중 동쪽별이 제일 크고 다음엔 북쪽하늘의 별, 그리고 다음은 서쪽하늘의 별이 세 번째로 크다. 별 셋을 선으로 잇는다면 길다란 삼각형이 될 것이다. 아버지가 별 셋 중 제일 크고 빛나는 동쪽하늘별을 형의 이름을 따서 훈이별(형의 이름이 훈임), 다음으로 큰 별인 북쪽별을 큰누나인 비취별, 세 번째 큰 별인 서쪽별을 산호별이라고 했다.
이른 아침에 들에 갈 때면 그 세별을 향해서 두 손을 합장하고는 `우리 훈이별아, 비취별아, 산호별아 억만 년 반짝이며 우리 삼남매랑 오래오래 살자꾸나` 하고는 마치 기복축문을 읊듯 하더란 말을 마을사람들은 했다. 아버지가 형의 별인 동쪽 별에게 먼저 기도한 것으로 보아서 아버지도 아들을 좋아한 것 같다. 그러나 딸들에게 조금도 사랑을 소홀히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 아버지께 하늘이시여 이게 웬일일까. 아버지가 그렇게도 아끼던 형이 여덟 살 때 홍역으로 죽은 것이다. 아버지로선 이보다 더한 호천망극이 있을 수 있을까. 형이 죽은 후 아버지는 거의 광인에 가까운 폐인으로 변한 것이다. 형이 죽은 후 아버지는 꼭 미친 사람같이 변해 버렸다.
나보다 열두 살 연상인 형이 여덟 살에 죽었으니 내가 태어나기 4년 전에 형이 죽은 셈이다. 얼굴도 모르는 형이지만 나도 죽은 형을 생각하면 가끔 눈물을 흘릴 때가 있다. 농사일을 누구보다 부지런히 했던 아버지였는데 형이 죽은 후로는 아예 농사일을 접어두고 형의 무덤에서 밤낮으로 살다시피 했고 행이 살았을 때 좋아했던 과자나 떡을 갖고 가서 형의 무덤 앞에 놓고 몇 시간 씩 울다가 그대로 쓰러진 것을 머슴들이 업고 오거나 어머니와 누나들이 부축해서 모시고 왔다.
겨울날 아무리 추워도 형의 무덤에 눈이 덮이면 빗자루를 갖고 가서 무덤에 덮힌 눈을 다 쓸고 당신의 몸이 다 녹아 버릴만큼 통곡을 하다가 그대로 잠이 들거나 쓰러지면 역시 머슴들이나 어머니와 누나들이 아버지를 들것에 메고 왔다. 형이 죽은 후 우리집은 파죽지세로 몰락했다. 땅을 당신의 생명같이 생각하던 아버지는 형이 죽은 후로는 땅도 싫고 돈도 싫고 부귀영화도 꿈이로다 하고는 반대로 매일 독한 술을 폭음하기 시작했다.
농사일은 머슴들에게 일임하고 일본 아니면 만주로 정처 없이 여행을 하거나 땅 팔아서 다른 사업을 했으나 백전백패였고 가산은 빠른 속도록 줄어들어 갔다. 그러면서도 아버지는 집에서나 객지에서나 새벽의 동족하늘에 떠 있는 큰 별을 향해서 마치 주술을 읊는 점술가처럼 죽은 형의 이름만 부르는 것이다. 별을 보고 읊는 주술이란 "훈아, 훈아, 우리 훈아, 이 애비도 하루빨리 너에게로 데려가다오" 하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일흔이 넘어서 세상을 떠났지만 한 가지 습관이 있었으니 새벽녘에 일어나서 마당 한가운데에서 어김없이 동, 북, 서쪽에 떠 있는 별 셋을 향해서(그 때는 누나들도 일찍 죽었음) 우는가 하면 형과 누나들이 좋아했던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노래를 집안 식구들이 다 듣도록 큰 소리로 부르곤 했다.
마을 사람들 말대로면 아버지는 완전히 정상인이 아니라고 했다. 형이 묻힌 묘지에 가는 것도 일흔이 넘어도 거의 매일이다시피 가곤했다. 우리집이 쪼그라들고 아버지가 비정상인과 같이 되고 보니 가족들이나 나도 아버지께 싫증을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아버지가 이 세상 어느 어버이보다 자식에 대한 사랑이 뜨거웠다는 것을 깨닫고 아버지 산소 앞에 가면 나도 통곡을 하고 마는 것이다. 내가 자식을 키워보니 자식사랑이 지극했던 아버지의 마음을 알 것 같다. 부전자전이었을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내가 아버지를 대신해서 동, 북, 서쪽의 별 셋을 때때로 쳐다보면서 얼굴도 모르는 형은 물론이고 이제 타계한 큰 누나, 둘째 누나를 그리며 비취, 산호 누나여 훈형의 별이여. 나도 죽으면 당신들께 가게 해주세요. 하고는 눈물을 흘릴 때가 있다. 대구의 2호선 지하철은 동서로 놓여있다. 내가 아침 조깅대신에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오가기를 좋아한다. 그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지하철을 타고 어디로 가다가도 일곱시 쯤 되면 우리집 근처인 범어역 동쪽 출입구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거대한 쇠홈통 끝에는 코발트색 하늘이 펼쳐있고 그 하늘에 형의 별이 나를 보고 반짝이고 있기 때문이다. 나도 "형, 지난 밤 잘 잤어요?" 하고는 형을 향해 손을 흔든다. `지하철 입구`라고 적힌 표지석 옆에서 나는 형의 별이 사라질 때까지 서 있는 것이다. 이윽고 날이 완전히 밝아지면 형은 어느 사이에 모습을 감추고 마는 것이다. 노경에 접어든 나는 꼭 아버지처럼 형을 그리워하면서 범어역 지하철 입구에 서서 동쪽 하늘을 하염없이 쳐다보는 것이다.
내가 범어역 동쪽 출입구로 나오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밖으로 나올 때면 아버지의 혼령이 내 몸에 들어온 듯 형이 그립고 불쌍해서 눈물이 나는 것이다. 내가 지하철 밖으로 나올 때면 형은 울지마라 동생아 나 이렇게 기뻐서 반짝이고 있잖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잠시 후 날이 더 밝아진 무렵엔 형의 모습은 흔적도 없고 빈 하늘만 펼쳐 있을 뿐이다. 동쪽하늘의 형은 목성(木星)일거라고 어느 초등학교 여선생이 말하는데 맞는 이름인지 나는 아직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