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대명절 설도 지나가고 정월 대보름도 지나갔다. 1년 열두 달마다 보름이 있지만 이 음력 정월 보름은 특히 대보름이라고 하여 여느 보름보다 다르게 쇤다. 그것은 우리 민족의 성쇠와 함께해 온 농사짓기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보름날 아침은 날이 밝기 전에 밥 먹는 것부터 의미를 뒀다. 농사일 일찍 시작하여 일찍 거둬들이라는 뜻이 있으며 오곡백과는 풍년의 상징이었으니 밥도 오곡밥을 해 먹었다.
이 정월 대보름에 인간사 그 해의 길흉화복을 갖가지 민속적 기원(祈願)으로부터 시작한다. 첫술에 토속 야채인 아주까리 잎으로 밥을 싸먹으면 꿩 알을 줍고 귀밝이술 먹기, 부럼을 깬다는 견과류 먹기, 보름날 만나는 사람에게 `내 더위사라`는 더위팔기 등이 대표적이었으며 각성받이 다섯 집 오곡밥 얻어다 디딜방아 가래에 앉아 먹으면 학질을 안 한다는 속신도 있었다. 어찌 보면 이런 것들이 오늘의 문명사회에서는 속신일 수밖에 없지만 이는 결코 속신이라고 치부하기엔 우리 민족의 마음속을 차지하고 있는 하나의 정령이니 아무도 이를 부인할 수는 없으리라. 세시풍속을 넘어 신앙에 가까운 민족 고유의 풍속이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 해의 신수보기인 토정비결도 빼놓을 수 없는 세시풍속의 하나였다. 길하다는 괘가 나오면 은근히 좋은 일이 있으려나 하고 기대하는 순진파가 있는가 하면 그 반대이어도 그냥 그 달에는 조심해야겠구나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일희일비일 뿐 얽매이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개인의 안녕도 중요하지만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고 마을을 지킨다는 수호신의 당산제(堂山祭)도 있었다. 주로 마을 뒷산 영험스런 큰 바위나 큰 나무 밑에서 지내는데 가까운 날에 부정(不淨)한 일이나 상여를 본 사람은 접근을 삼가야 하며 정결한 사람을 마을에서 정하여 새벽에 지내게 했다. 제수는 돼지머리인데 쓴 돼지머리는 땅에 묻는다는 말이 있어 내 어릴 적 장난꾸러기 동무 하나는 그것 캐러가자고 한 일도 있다.
또 농악도 빠지지 않았다. 지금에 와서 그 이름은 대중화가 됐지만 당시에는 걸궁이라는 이름이 더 친숙했다. 걸립패라고도 했는데 이는 승려들이 각처를 돌아다니며 집집마다 염불을 해주고 시주를 받는 행태를 두고 한 말이라 한다. 마을 공동체에서는 마을을 위한 경비가 필요할 때 그 염출 수단으로 쓰기도 하는 마을 공동체 정신이 녹아 있는 전통 습속이었다.
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농기(農旗)를 앞세우고 동네 골목골목을 돌며 집집마다 지신을 밟아 악귀를 쫒았다. 터를 지키는 지신, 집을 지키는 성주신, 부엌의 조왕신, 아기의 점지·산모·출생한 아이를 지킨다는 삼신을 추임새를 넣어가며 꽹과리와 징소리의 굉음과 귀청을 찢는 날라리 소리로 어우러진 신명나는 한판의 놀이로 지축을 울렸으니 악귀는 어디 발붙일 곳이 없을 게 틀림없었다. 게다가 탈 쓴 해학꾼의 익살과 여장한 남정네의 막춤으로 폭소를 터뜨리게 했으며 온 동네는 축제의 절정을 이루었다. 이 걸궁놀이는 윷놀이와 함께 정월 초부터 시작해 한 달 내내 이어가기도 했다.
대보름날의 빼놓을 수 없는 행사는 단연 달맞이 불놀이었다. 산신제를 지내는 당산 꼭대기에 솔가지로 삼각원뿔 모양으로 쌓아놓아 불을 지르고 달 뜰 시각이 되어 가면 동쪽 하늘만 뚫어져라 쳐다본다. 좀체 얼굴을 내밀지 않던 달이 운무 사이로 새아씨의 눈썹 만하게 수줍은 듯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다. 누군가가 `달봐라!`라고 소리치면 나머지는 그냥 따라 하기만 했다.
언젠가는 달은 틀림없이 뜰 것이고 못 봐도 본 척 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내 유소년 시절이었으니 나도 미처 보지도 못하고 소리만 쳤던 것이 지금 생각나 웃음이 나온다.
달보고 절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제일 먼저 본 사람은 결혼을 한다거나 소원성취를 할 수 있다고도 했고, 달이 붉으면 가물고 희면 장마가 든다는 농업 사회의 한 단면을 보이기도 했다.
이들 모두는 내 고향 법산에서의 60여 년 전의 일이다. 당시의 대보름 행사와 민속놀이는 지방마다 다르고 또 동네마다 다를 것이다. 오늘날엔 지방과 도시의 경계가 허물어졌지만 당시엔, 우선 서울 같은 도시에서는 다리 병이 없어지고 액을 면한다는 답교놀이와 사자탈놀이도 하고 전라도와 경상도 남해 등에서는 부녀자들의 강강수월래(强羌水越來)라는 원무를 추기도 했다 한다. 강강수월래는 원래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우리 군의 힘이 강성함을 왜군에게 보이기 위해 곳곳에 불을 놓고 이 놀이를 했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역사는 말한다.
이와 같은 드러난 무형문화재야 지금도 국가적 행사로 1년에 한두 번 시연회도 갖지만 그 반열에도 동참하지 못하는, 우리 민족과 함께 고락을 같이 해온 세시 민속풍속이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려 함에 안타까워 몇 자 적어본 것이다.
이밖에도 우리의 혈맥을 타고 흐르는 민족 고유의 유·무형 문화재급의 세시풍속이 있을지니 잊혀 지기 전에 보전·전승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