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시대를 일러 글로벌 시대라 한다. 사전적 의미의 국경이라는 말도 무의미해 졌으며 민족이란 개념도 적어도 글로벌이라는 키워드 앞에서는 어쩐지 좀 모호한 시대가 되었다는 논자도 있다. 이런 때에 고향을 그리워하고 향수 운운하면 자기모순일까? 하지만 그래도 고향은 고향이고 향수는 향수이다.
정주민족인 우리 민족에게는 뼈아픈 이민사도 있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이민, 구 소련의 강제이주, 간도의 생업이민 등으로 사무친 향수병은 우리 선인들에게는 한 시대의 숨길 수 없는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
고향을 떠난 지 30여 년이 다 된 내가 사노라니 틈틈이 영창에 비친 달을 보고 느끼는 낭만적인 향수를 간직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아마도 그것은 이른바 귀소본능이고 호사수구(狐死首丘)에 다름아니리라. 간혹 해외에 사는 우리 동포들이 실향민이라는 말을 쓰지만 그것은 국경이 무의미한 시대에 사는 오늘에선 어쩌면 고향을 미화하는 말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고향은 언제나 아름답고 따뜻하다. 정서적 본향이다. 탕자도 돌아오면 반가이 맞아주는 곳이 고향이다. 고향은 어머니 품속 같다 했으니 어머니와 고향은 동의어인지도 모른다. 어머니를 송찬(頌讚)하고 고향을 노래하지 않는 시인가객이 있기나 하겠는가?
나의 고향 星州! 언제부터 성주라는 이름이 생겨났을까? 역사·지리지인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신라때의 본피현(本彼縣)이 군명 기록의 처음이며 6가야의 일원인 성산가야로부터 신안, 벽진, 광평, 대주, 경산, 흥안 등으로 변천해 왔으며 군, 현, 목, 단련사, 도호부로 승격과 강등으로 부침하다가 고려 충렬왕 때에야 최초로 성주라는 지명을 쓰게 되었다 한다. 그런 군세의 부침과 흥망의 한 시대인 경산부(京山府)일 때는 북으로는 충청도의 옥천, 영동과 남으로는 고령, 칠곡, 대구, 화원까지 영역이 넓었던 때도 있었던 성주였다. 이른바 행정 지역체계가 주부군현제(州府郡縣制)일 때의 가장 강성했던 성주를 나타내는 역사이기도 하다.
내 고향 성주! 산자수명은 우리 성주를 두고 한 말인가? 남도의 영산 가야산 정기는 골골마다 뻗어 내렸고, 그래서 이중환의 택리지가 말했듯 8도의 기름진 땅은 성주가 으뜸이라 했던가. 더욱이 조선조 세종의 적서 18왕자의 태실이 안치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른바 생 활 사(生·活·死)의 길지임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으리라.
산천경개 정기 따라 인걸이 난다고 했음인가, 근현대에 와서는 거유요 교육자요 독립운동가인 심산 김창숙(心山 金昌淑) 선생이 나셨다. 유학의 총본상 유도회의 조직과 성균관대학을 설립하셨고 구국 독립운동에서, 반독재 투쟁의 선봉에서 보이신 선생의 기개와 강개는 불세출(不世出)에 다름아니었다.
얼마 전에 빠듯한 일정으로 고향 가던 길에 내 동생의 권유로 심산 선생의 생가에 들렀다. 선생의 위대한 업적에 비해서는 어딘지 모르게 좀 허술함을 감출 수 없었다. 역사교육의 현장이라는 의미와 원형 보전에 뜻이 있다고 하지만 내부 단장도 좀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선생뿐만 아니라 여느 독립지사의 후손들도 하나같이 영락(零落)하다는 현실에 우선 가슴이 아렸다. 신명을 바쳐 나라를 구한 독립운동가의 후손에 대해서는 관심조차도 갖지 않는 세태는 아닌지 다시 한 번 우리들을 돌아보게 한다. 신문·방송도 3.1절, 광복절 같은 때에나 후손들을 찾는 것이 몹시도 안타깝다고 입을 모은다. 인터뷰를 청하면 후손들은 하나같이 `목숨 바쳐 나라 구한 대가가 겨우 가난뿐이냐`고 할 땐 숙연해지기도 했던 우리들이었다. 모두들 말은 쉽게 한다. `독립운동가의 집은 3대 가난이고 친일파의 집은 번창일로`라고. 그날 그 심산 선생의 생가를 보는 느낌도 그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인기척을 했더니 안방에 누워계신 할머니 한 분이 몹시도 힘겹게 일어나시는데 그 분이 바로 선생의 독립운동을 도운 며느님 손웅교 할머니라는 것이다.
국내는 물론 중국, 만주로 때로는 변장을 하고 때로는 주야로 걷기도 하며 일경의 눈을 피해 독립자금과 중요 문건을 비밀결사체로 전하려 대륙을 누볐다는 것이다.
독립운동은 선생만 하신 게 아니다. 환기(煥基), 찬기(燦基) 두 아드님도 투옥, 혹독한 고문으로 옥사하고 병사했으니 일가족 모두를 이 나라 독립운동 제단에 바친 것이다. 내 어쭙잖은 문안이 손 여사를 일어나게 하는 것 같아 오히려 송구하기도 하여 인사만 하고 물러나왔다.
빼앗긴 나라 다시 찾고 찾은 나라 바로 세우려 반독재 투쟁에 서셨던, 기개와 강개로 일관하셨던 선생이었지만 지금 생가에는 나는 새도 한 마리 찾지 않는 듯 고요와 적막만이 감돌고 있었다. 간간이 기세등등한 왜경을 향한 선생의 질타와 독재정권을 향한 일갈의 사자후가 여운이 되어 어디선가 들리는 듯했고, 일본 법론에 의한 변론은 받지 않겠다는 의연한 성생의 풍모가 어른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심산 선생이 일경의 혹독한 고문 후유증으로 병와(病臥)에 계실 때 독립투쟁 항일 전선에 남편을 바친 손 여사가 선생을 봉양하고 계실 때였다. 아직도 지분향(脂紛香)이 풍겨야 할 새색시인 며느리가 얼마나 안쓰러웠던지 `얘야! 너 그러지 말고 담배라도 배우라`고 강권함에 따라 손 여사가 담배를 배웠다는 일화가 있다고 동생이 또 알려주는 것이었다.
내 철이 들 즈음 일경의 모진 고문과 엄혹했던 왜정치하의 수감 생활로 인하여 앉은뱅이가 되었다고 어른들이 하는 얘길 들었다. 그때는 누굴 두고 하는 얘긴지 몰랐지만 지금에 와서 벽옹(躄翁)이라는 선생의 호를 보고 아하! 그때 그 어른들이 한 말은 바로 "사도실 김창숙을 두고 한 말이었구나"라는, 참으로 때늦은 깨달음이 된 것이다.
내 고향 성주! 우리 성주를 선비의 고장이라 함은 심산의 스승 대계 이승희(大溪 李承熙) 선생이 계심도 결코 우연은 아닐지니 사제의 두 강개지사는 을사늑약 이후 악명 높은 통감부가 이 강토를 병탄하려 할 제 대계 선생은 심산을 대동하고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疎)를 올린 것은 고결한 절의와 강개의 결정판이요 애국애족의 표상이며 사표였다. 두 분 지사는 나란히 독립기념관에 항일 시어록비가 모셔져 있으니 이 시대를 사는 우리 성주인들은 경모지심을 가져야 함이 마땅할 것이다.
오늘의 이 나라가 있기 까지 심산 같은 불굴의 구국지사가 있었다는 사실조차도 잘 모르는 것 같고, 안다는 일부 정치인들도 실패한 역사라고 재단하고 제 나라 역사를 폄훼할 때는 참으로 안타깝다 못해 말문이 막히고 만다.
나의 성주! 대계와 심산 선생뿐만 아니다. 근현대에 와서 나라와 성주를 빛낸 각계의 명현은 그야말로 가라성이다. 이런 분들을 둔 우리 웅도(雄都) 성주의 후생들은 자부와 자존감을 가져야 하리라!(2009.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