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의 비운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레닌의 공산주의 사상에 심취한 호치민(胡志明)이 결사 항쟁으로 프랑스군을 축출하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1954년 7월 21일에 체결된 제네바협정에 따라 베트남은 북위 17도 선을 경계로 하여 소련이 지원하는 북부 베트남과 미국이 지원하는 남부 베트남으로 분단되었다.
그러나 북베트남의 공산주의 게릴라 세력과 연계한 남베트남의 친 공산주의자들이 고딘디엠(吳廷琰)대통령의 부패한 친미정권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인도차이나반도와 동남아 전체가 공산화될 것을 우려한 미국이 개입함으로써 제2차 베트남전쟁(1955년-1975년)이 발생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는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즉 베트콩이 미국의 지원을 받는 고딘디엠의 경찰정부와 미군에 대항하여 싸운 전투였으나 1964년 통킹만사건이 계기가 되어 북베트남과 미국간의 전면전으로 확전되었다.
※통킹만사건: 1964년 8월 북베트남의 통킹만에서 발생한 미국과 북베트남간의 충돌사건이다. 통킹만에서 미국 구축함이 북베트남 어뢰정의 공격을 받자 미 공군은 북베트남의 연안기지를 폭격하였다. 이 사건을 통킹만사건이라고 하는데 이에 격분한 미국 L. 존슨 대통령은 전쟁 수행 권한을 대통령에게 부여할 것을 의회에 요구하였으며, 의회는 압도적인 다수로 이것을 승인하였다.
전쟁이 전면전으로 확대되면서 어려운 국면에 직면한 남베트남정부(=월남정부)와 미국은 우리나라에 전투부대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해 왔다. 우리 정부는 6?25전쟁 때 우방 특히 미국으로부터 입은 은혜에 보답하고 국익을 위하여 파병을 결정, 건설과 의료 분야를 담당하는 비둘기부대를 필두로 하여 맹호부대, 청룡부대, 백마부대 등을 차례로 파병하였는데 1965년부터 1972년까지 월남전에 참전한 한국군의 총 병력 규모는 31만2천853명에 달한다.
한편 미국은 1965년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 개시와 함께 베트남전쟁이 격렬해지자 베트콩 게릴라의 은신처를 없애고 베트콩의 군수물자 보급을 차단하기 위하여 엄청난 양의 고엽제(枯葉劑)까지 사용했으나 끝내 승리하지 못하고 남베트남정부가 1975년 4월 30일에 북베트남에 무조건항복을 함으로써 20년에 걸친 지루한 베트남전쟁은 공산주의자들의 일방적인 승리로 종결되고 베트남 전체가 공산화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