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첫째토요일 밤부터 비가 내린다. 모처럼 인송 선생과 북한산 산행약속을 했는데 걱정이 앞선다. 며칠 전 부터 배탈이 나서 죽을 먹고 겨우 속을 다스리긴 하였으나 기운이 하나도 없는데다 비를 맞으며 산을 오른다는 게 엄두가 나지 않아서이다. 그래도 오랜만에 한 약속을 어길 수도 없기도 하지만 이 정도로 포기할 수는 더더욱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배낭을 챙기고 우산이랑 비옷도 준비를 해서 일찌감치 출발을 하였다.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약속장소인 구기동 삼각산 머루집 앞에 도착한 시간은 8시 30분. 30분이나 일찍 온 셈이다. 나는 사탕을 하나 입에 넣고 천천히 녹여서 삼키고 나자 기운이 좀 나는 듯하다. 잠시 후 도착한 인송 선생은 전부터 가지고 다니던 긴 나무지팡이를 든 모습이 참 잘 어울린다. 일행이 있다고 들었는데 비가 오는 바람에 다들 포가를 했단다.
비 오는 날의 산행이 얼마나 멋이 있고 운치가 있는지 산을 자주 안 다녀본 사람들은 알리가 없다. 그래 오늘 나는 그 기쁨을 만끽하리라.
머루집 사장이 미침 나와 있어서 이따가 들리마 약속을 하고 참 오랜만에 두 사람이 함께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구기동 구간은 코스가 좋긴 한데 교통이 좀 불편한 관계로 자주 오지 못한 것 같다. 경복궁역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한참을 가야 히는 불편 때문에 전철 이용이 편한 곳을 찾다보니 불광역에서 사모바위 쪽 코스를 자주 다니는 편이다.
비는 그치지 않고 계속 오는데 우산을 들고 오르는 산길은 등산객도 거의 없는데다 자욱한 안개 때문에 십 미터 앞도 채 보이지 않는 가운데 계곡물소리는 요한 스트라우스의 봄의 왈츠처럼 들리고 마치 천국으로 오르는 듯 신비롭기까지 하다.
"이렇게 한다고 정말 건강에 좋아질까 모르겠네?"
"아이구 그럼요, 이보다 더 건강에 좋은 운동은 없어요"
"그럴까? 허허, 그럼 열심히 올라가 봐야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오르다보니 승가사와 대남문의 갈림길이다. 나는 대남문 코스로 갔으면 했는데 인송 선생은 사모바위가 전망이 좋다고 해서 승가사코스를 택해서 발길을 재촉했다. 힘들 줄 알았던 몸 상태는 다행히 산행 하는데 큰 무리는 없었다. 그런데 사모바위에 도착했을 때는 짙은 안개 때문에 인송 선생이 바랐던 좋은 풍경은 감상 할 수가 없어서 조금 아쉬웠다.
맑은 날의 북한산도 멋이 있지만 비 오는 날의 북한산은 더 좋은 것 같다. 우선 평소에는 시장통 같이 북적이는 사람들이 눈에 띌 정도로 많지 않은 것이 나는 너무 좋고 빗속으로 보는 자연의 모습은 더욱 환상적인 것 같다.
비가 오지 않았다면 사모바위 앞 헬기장 주변은 등산객들로 시끌벅적할텐데 오늘은 거짓말같이 한사람도 없다. 안개 때문에 바로 앞에 있는 사모바위도 잘 보이지를 않는다. 전망대 앞에서 한참을 쉬고 있는데 진관사 쪽에서 한 무리가 올라온다. 이런 날씨에도 힘든 코스를 올라온 걸보면 정말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인가 보다.
오늘따라 인송 선생은 별로 말이 없다. 일흔을 넘긴 나이에도 작품 활동을 왕성히 하는 편이고 현실문제에도 관심이 많은 분인데 본인이 이끌던 단체를 후배들에게 다 넘겨주고 한발 물러서있는 입장이다 보니 이제는 젊은 사람들에게 밀려나는 느낌에 심리적으로 위축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사람은 물러날 때를 잘 선택하고 인생의 마무리를 아름답게 장식하는 것도 중요한 게 아닌가 생각해 본다.
나 자신도 인생 후반부를 어떻게 꾸려 나가야 할지 고민이 많다. 이제는 잡다한 일들은 정리하고 훌훌 털어야지 하면서도 막상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사람이 마음을 비우고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내려놓기가 쉽지가 않은 것 같다.
정상에 오르면 내려가기 싫어도 내려갈 수밖에 없는 게 이치가 아니던가? 그런데 사람들은 더 높은 곳이 없나하고 위를 쳐다보며 더 욕심을 부린다.
"자! 이만하면 되었네 그려, 이제 그만 내려 가세나"
나 자신에게 조용히 타이르고는 일어나서 하산을 시작했다. 내려갈 때도 조심을 해야 한다. 한발 한발 잘 내딛고 주변을 살피면서 가지 않으면 자칫 미끄러져서 다칠 수도 있는 것이다.
산행을 하면서 인생을 배우다고 하는데 정말 그런 것 같다. 힘들게 내려가던 인송 선생은 승가사 입구에서 등산로가 아닌 사찰에서 닦아놓은 찻길로 하산하기를 제안해서 편하게 내려오게 되었다.
요즘은 웬만한 사찰에는 자동차가 들어 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 놓은 것 같다. 강원도 백담사에도 차량이 드나드는 걸 본 기억이 있는데 마음을 닦고 정성을 드리러 가는 곳이라면 수행의 연장선에서라도 어느 정도 육체적 고통을 마다하지 않는 것이 옳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찻길로 내려오다 보니 머루집은 못 들리고 인송 선생의 단골집인 한식당 민속집에서 된장찌개와 보리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고는 그 길로 백사실계곡을 지나 부암동에서 인송 선생과 작별을 하고 경복궁 전철역까지 걸어서 내려올 때까지 비는 그치지 않고 있었다.
저녁에는 기온도 떨어지고 강원도 쪽에는 폭설이 내린다 하니 봄을 맞이하기가 영 만만치가않고 힘이 드는 것 같다.
남녘에서는 매화 산수유는 물론 벚꽃도 만개했다는데 북악의 개나리, 인왕산의 진달래는 언제 필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