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수(시인)
유년의 목숨 찾으러 봉두리 간다
봉두리는 내 유년이다 예닐곱 살
봄날보다 앞서 피던 바알간 참꽃이 있다
철철철, 산 개울을 빠져나온 물줄기
제멋대로 돌아가는 물레방아가 있다
아직 덜 녹은 얼음, 응달 계곡에서
솔가쟁이 분질러 미끄럼 타면
앞집 끝순이 엉덩이가 후줄근히 젖고
땅버들 새순을 씹어 껌을 만들기도 했다
온통 퍼래진 입술로 입맞춤도 했다
그 입맞춤 여태 잊을 수 없다
온통 밤을 들쑤시던 개구리 소리
미나리꽝 초입, 인기척에 일순 멈추면
손주 옷을 짓는가 그 밤, 가까이 들리던
외할머니 재봉틀 소리, 재봉틀 소리
졸참나무 잎을 흔드는 바람이 되었다
흙먼지와 잔돌뿐이었던 초등학교 운동장
교장이었던 아버지 치시던 풍금소리도
봉두리는 댐이 되었다 온통 안개뿐
깊은 물이 퍼올리는 하얀 안개 속
갈색 물까마귀 퐁당퐁당 재밌는 장난질이지만
내 유년은 숨이 막힌다 눈물이 난다
그래도 봉두리 간다 내 유년 서너댓 살의
봄날보다 앞서 오는 바알간 참꽃도 있다.
* 봉두리는 경북 성주군 금수면에 소재한 마을로 성주댐 공사 때 수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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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잃은 사람의 슬픔은 고향을 잃어 보지 않고서는 모를 것이다. 그래서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 했던가. 성주댐 바로 밑 산자락에 납작 붙어서 아슬아슬하게 살아 남은 내 고향 마을 강정에 갈 때마다 나는 이 댐의 깊은 물빛 아래 수장된 김 시인의 마을 봉두리를 생각한다. 시인은 북에 고향을 두고 내려온 사람들과는 또다른 영구 실향민이다. 그의 고향 마을은 현실세계에서 완전 삭제되었다. 그런데도 시인은 사라진 고향의 부재(不在)를 인정할 수가 없다.
그는 고향 마을 산중턱쯤으로 어림되는 물가에 와서, 그 옛날 물방앗간 물레방아와 얼음, 솔가쟁이, 땅버들, 개구리, 미나리꽝, 끝순이, 외할머니 재봉틀 소리, 졸참나무 잎을 흔드는 바람, 아버지의 풍금소리...... 들을 기억해 내면서, 피어오르는 안개와 갈색 물까마귀의 장난질을 보고 있다. 그의 '유년은 숨이 막히'고 '눈물이 난다.' 그래도 그는 오늘도 '봉두리 간다.' 아직도 봉두리의 산봉우리에는 봉두리와 그를 이어주는 '바알간 참꽃'이 있고 푸른 물 위를 떠도는 유년의 하늘이 있으므로.
그는 고향 봉두리를 빼앗겼다. 하지만 그가 끝끝내 봉두리를 놓아주지 않는 한, 살아서 봉두리를 잃어버리는 날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배창환·시인·성주문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