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가 고향인 사람에게 뇌리에 떠오르는 서정과 풍경은 참외, 가야산, 성밖숲, 낙동강 등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 중에서 성밖숲은 예나 지금이나 고향의 옛집처럼 향수의 정감을 불러일으킨다. 성밖숲은 맑은 시냇물이 휘감아 돌아가고 냇강 저편에는 질펀한 들판으로 이어지며 사방이 크고 작은 산으로 둘러싸여 풍경이 빼어난 곳이다.
사시장철 성밖숲이 우리에게 내리는 혜택은 무한하다. 이른 봄 뭇나무들이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않을 때 성밖숲은 순한 연두색으로 갈아입어 봄을 알리는 전령이 된다. 여름에는 녹음이 짙어져 시원한 바람과 더불어 뭇사람에게 쉼터를 제공한다.
지금은 단오날이 명절의 의미가 사라졌지만 50, 60년 전만 하더라도 성주군민들은 성밖숲에 모여 풍년을 기원하면서 남자는 씨름대회에 나가서 힘자랑을 하고 여자는 추천대회(그네뛰기 시합)에서 그네를 탔다. 연이어 음식을 서로 나누어 먹으며 흥겨운 농악대와 더불어 춤추고 노래했다.
필자는 성밖숲을 찾을때 마다 잊을 수 없는 추억의 한 토막이 떠오른다.
63년 전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촉발된 6.25전쟁은 집과 학교와 거리를 온통 잿더미로 변화시켰고 간혹 남아 있는 집이나 건물들은 총탄자국으로 일그러져 전쟁의 참상을 말해 주었다.
1950년 9월 국군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대부분의 국토가 회복되었고 고향성주도 평온을 되찾게 되었다. 그해 10월 중순 굶주림과 불안공포에 시달리던 피난살이도 점차 정상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날 학교에 나오라는 전달을 받았다. 이튿날 아침 일찍 등교를 하니 학교(현 중앙초등학교) 건물은 폭격에 의해 거의 파괴되었고 운동장에는 잡초가 무성하였다.
교감선생님은 마치 훈련을 마친 군인들을 무슨 부대에 배치하듯 각 학년별로 수업할 장소를 알려 주었다. 예컨대 학생수가 비교적 적은 5학년 학생은 살망태(성주읍 성산동) 어느집 고방(창고)으로, 학생수가 많은 2학년(필자는 당시 초등학교 2년에 재학) 학생은 성밖숲으로 등교하라고 하셨다.
이튿날 성밖숲을 찾아가서 주위를 살펴보니 외진 곳에 서있는 큰나무 둥치에 검은 칠판 하나가 덩그렇게 걸려 있었고 맨바닥에 친구 몇 명이 앉거나 서 있었다.
전란으로 흩어졌던 동무들을 만나니 반갑기 그지없었으며 피난길에서 겪었던 이야기를 주고받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다. 당시 학우들 대부분은 전란의 와중에서 책도 공책도 필기도구도 없이 맨바닥에 앉아 선생님의 말씀을 귀로 듣고 칠판에 적힌 내용을 눈으로 보는 것이 수업의 전부였다.
전란의 암울한 시기에 성밖숲 맨바닥 교실의 추억 속으로 들어가면 사명감에 찬 열정적인 선생님들의 모습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그 중 한분의 모습이 떠오르는데 `장병숙` 선생님으로 자그마한 몸매이지만 매우 당차보이셨다.
선생님은 칠판에다 금고기 이야기 달이 가나 구름이 가나 등 동화의 몇 구절을 쓰신 후 공책이 없는 학생들에게 종이와 연필을 나누어 주시면서 방과후 칠판에 쓴 내용을 열심히 복습해 오라고 하셨다. 선생님은 가끔 얼굴도 씻지 않고 맨바닥에 앉아있는 아동들을 냇가로 데려가서 깨끗하게 씻기고 닦아주기도 하셨다.
요즈음 참교육이 사라지고 있는 시대에 살면서 전쟁의 폐허 속에 꿈과 희망을 가르쳐주신 선생님의 모습이 그립다. 어느덧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면서 성밖숲 맨바닥 교실에 앉아 달이 가나 구름이 가나를 열심히 베끼던 옛 친구들의 모습이 그립다.
성밖숲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 모두의 벗이요, 정든 옛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