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화의 물결을 타고 서울이 팽창할 때, 넓은 듯하면서도 좁은 땅 서울을 비집고 들어선지 대강 40년이 흘렀다. 내 고향 초막에서 출생하여 돌담을 끼고 살면서 상상만 하던 서울은 지금의 미국쯤이나 될 선망의 땅이었다. 적어도 그땐 그랬다. 딱히 갈 곳을 정해 놓은 것도 없이 당시의 시대 상황에 따라 무작정 상경을 결행한 것이다. 12월의 이른 새벽에 내린 서울역의 낯선 염천교길은 휘파람 소리를 내는 칼바람의 동장군이 먼저 나를 맞아주었으니 우선 몸이 움츠려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추위 때문만이 아니라 냉엄한 현실과 부딪쳐야함에 더욱 그랬다. 거기다 마스크 쓴 입에서 하얀 입김을 토해내며 마스크 파는 행상인들을 보면서 우선 서울이 어떤 곳인가를 가늠할 수 있었다. 더구나 서너 사람이 같은 품목을 팔며 내 것만 사라는 광경에서 치열한 생존경쟁을 확인하는 순간 자그만 충격 으로 다가왔다. 서울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날 새벽 내 눈으로 확인했던 그 마스크 행상이 때로는 자극제가 되기도 하며 나름대로 그런 세태에 섞여 10년을 살다보니 겨우 내 집 문패를 걸 수 있었다. 꽃아내를 만났던 날도, 첫딸을 얻어 함박웃음을 웃던 날도 이보다는 좋을 수가 없었다. 강남이 개발되어 `아파트`가 주택문화를 선도해 가도 20여 평 남짓한 내 단독주택이 더 소중했다. "남의 새 정승이 내 헌 백정만 못하다"가 바로 나를 두고 한 말은 아니었을까?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그 다음이 문제였다. 참으로 어이없게도 그때 내가 이 정도면 중산층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착각도 이쯤이면 가히 메가톤급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과는 달리 80년대만 해도 계층 분포도가 중간계층이 절대다수를 이루는 이른바 `항아리 구조`였을 때이니 집만 가져도 중산층이라 할 수 있었던 때가 있기는 있었다. 더 분명한 것은, 그 용어가 사전적 의미로나 쓰였을 뿐이데, 오늘의 더욱 침체된 경제 현실은 상위 일부 계층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가 빈곤층으로 몰락했다고 하고 있으니, 그 이전에는 나 같은 사람도 중산층이라 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혹독한 금융위기를 치르고 난 다음 `1:99`라는 극한적 담론을 펴는 사람도 있고 `하우스푸어`라는 신조어가 생겨난 지금을 보면 더욱 실소만 나올 뿐이다. IMF! 지금 들어도 가슴 철렁한 얘기다. 유독 내가 종사했던 전통시장만 한파가 닥쳤을까만 시장은 하루가 다르게 침체일로였다. 언제면 경기가 살아날까 이제나 저제나 하다가 그예 접고 말았다. 하던 일 접었으니 무료는 일상이 되었고 그러던 중 초등생 외손자 둘의 운동회가 있었다. 자식 귀엽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만 손자는 더 귀여워 눈에 넣어도 안 아프다고들 한다. 그 전날 밤은 마치 내 초교시절 소풍 전날 밤같이 설레었다. 제 어미 때 내가 딸아이 손잡고 뛰었듯 이번에는 할아버지와 손자가 뛰면 더 의미가 있겠다고 미리 들떠 있기도 했지만 그런 순서는 끝내 없어 못내 서운했다. 모두들 즐거워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아들딸들의 한마당 축제가 시작되었다. 내 아들 내 딸이 따로 없었다. 모두가 내 딸 내 아들이었다. 함성도 일었다. 폭소도 터졌다. 리듬에 맞춘 박수는 고조된 분위기를 이끌기에 충분했다. 모두들 동심으로 돌아가 얼굴 가득 웃음을 날렸다. 내 아들 내 딸 구분이 없듯 학부모도 모두 남남이 아니었다. 1학년의 군무는 색동옷에다 족두리를 쓴 앙증맞은 그 분장만으로도 폭소가 먼저 일더니 나비 날갯짓을 비웃는 춤사위로 절정을 이룬 재롱 한마당이었다. 태권 율동에서는 선생님의 구령을 놓쳐도, 좌우가 엇갈려 때 아닌 좌충우돌을 연출해도 배꼽 잡는 폭소와 함께 박수만 터졌다. 만약 선풍을 일으켰던 `노바디`를 선택했으면 아마도 `잡은 배꼽 아주 빠졌을 텐데…`라는 아쉬움을 되뇌어 보기도 했다. 사람들은 가끔 어릿광대에 환호한다. 그러나 그 환호는 어린이들이 펼치는 기예와는 비할 바가 아니다. 그것은, 광대들의 숙련된 어릿짓은 작위적 모사품인 반면 어린이들의 기예는 미숙은 하지만 진품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잘한다는 우쭐함도 없고 못한다는 주눅도 없는, 그야말로 순수함의 원형질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우리 00초등학교 최고 학교?`라고 지휘 선생님이 선도하면 `이옛설(yes sir)`이라는 화답으로 온 운동장이 떠나갈 듯했다. 시각도 감각도 모두 즐거우면 웃음이 나온다. 웃음이 일상의 활력소이고 삶의 청량제임을 새삼 알게 했다. 어느 젊은 새댁에게 내 나이 70이라는 것도 잊은 채 10 년 안에 이렇게 웃은 적이 없다고 주착을 떨기도 했다. 전에 어른들이 말했다. 아이들이 없으면 웃을 일도 없다고-. 지금 우리 집이 그렇다. 자식들 제 갈길 다 가고 70줄에 들어선 두 늙은이, 40여 년을 살 비비며 살아온 정리로 하여 구태여 웃지 않아도 이심전심으로 소통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들 생활의 모두가 희로애락이지만 유독 외손자들의 운동회만 각인된 것은 왜일까? 그날 그 운동회의 웃음 한마당으로 일상의 무료도, 무미건조함도 다 털어내며 마음 놓고 참으로 많이 웃었다. 그런가 하면 아쉬운 것도 있었다. 6.25전후 우리들 때에는 운동회 즐거움 못지않게 평소 쉽게 먹어보지 못했던 밤고구마 등을 먹던 점심시간이 없었던 것 말이다. 배고픔을 겪었던 세대인 내가 먹는 것 얘기하자니 어쩐지 좀 구차함을 느끼지만, 그래도 세상은 참 많이 변했음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외손자와 헤어지며 "수진아! 다음 운동회는 또 언제 하니?" "할아버지, 내년에 또 할게요. 더 재미있게 할 거예요." 삼삼오오 짝을 지어 각각의 교실로 향하는 것을 확인하고 우리 부부는 웃음과 함성과 박수소리를 뒤로 하고 교문을 나섰다.
최종편집:2025-07-11 오전 11:2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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