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는 중국 전국시기의 대학문가였다. 그는 유가(儒家)들 가운데서 지위가 공자의 버금으로 간다. 전설에 의하면 맹자의 성장은 그의 어머니의 교양과 극히 큰 관계가 있다고들 말하곤 한다.
맹자는 추나라 사람이었다. 맹가네가 처음 살던 집 근방에는 공동묘지가 있었다. 맹자는 어릴 때 늘 묘지에 가 놀았는데 남들이 시체를 파묻고 제사 지내는 것을 보고는 제 또래들과 함께 관을 메고 무덤을 파고 제사 지내는 놀음을 놀았다. 이런 전경을 본 맹자의 어머니는 여기는 아이를 교양하는데 불리한 곳이라고 여기고 이사를 하였다.
맹가네는 시내로 이사하였는데 집 근처에는 장마당과 가게가 있었다. 맹자는 시내로 이사 온 후 또 제 또래들과 장사하는 놀음을 놓았다. 맹자의 어머니는 그것을 보고 몹시 불쾌하였다. 그는 여기도 아이를 교양하는데는 불리한 곳이라고 여기고 또 그곳을 떴다.
맹가의 집에서 세 번째로 이사한 곳은 학궁 곁이었다. 그때의 학궁이란 학교의 교사인 동시에 과거의 이름난 학자들을 제 지내는 곳이기도 하였다. 맹자는 학궁을 내왕하는 사람들이 다 예절이 바르고 공부에 열중하는 것을 보고는 제 또래들과 늘 예절 바르게 대하는 놀음을 노는 것이었다. 맹자의 어머니는 이때에야 흡족해하였다. 맹가네 집은 거기서 오래 살았다.
맹가의 어머니가 무덤 파는 사람과 상인의 노동을 경시한 것 같지만, 그러나 그가 아이의 놀음에 주의를 돌렸고 또 환경이 아이에게 주는 영향을 고려한 것은 아주 견식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후세의 사람들은 그가 은연중에 감화시키는 작용을 잘 알고 있었다고 칭찬하곤 하였다.
맹자는 커서 학교에 들어갔다. 하루는 맹자가 하학하기 전에, 즉 학업 도중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의 어머니는 베틀에서 짜던 베를 가위로 뭉텅 베어버렸다. 맹자는 깜짝 놀라며 어머니에게 왜 그러냐고 물었다.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였다. "네가 중도에서 공부를 그만 두는 것은 내가 중도에 베를 베어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 일이다. 군자는 부지런히 배우고 물어야만 넓은 지식을 가질 수 있으며 그래야 일생을 순조롭게 일할 수 있고 화한을 모면할 수 있는 거다. 지금 네가 하학하기 전 도중에 집으로 돌아오니 장차 어찌 전도가 있을 수 있겠느냐? 우리 집은 내가 베를 짜는데 의해 생계를 유지하는데 내가 베틀의 베를 뭉텅 베어버렸으니 먹고 입을 재원도 끊어진 것이 아니냐"
어머니의 권고는 맹자에게 커다란 자극을 주었다. 이때부터 맹자는 고심히 배울 것을 결심하였다. 후에 그는 아주 이름난 유가(儒家)학자가 되었다.
※ 儒家 = 중국춘추전국시대 孔子와 孟子를 대표한 한 개의 학파, 그들은 "仁"을 중심으로 한 도덕(道德) 관념을 제창하였으며 덕(德)으로 다스리는 것을 주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