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잡문 수준이지만 끼적이다 보니 `이름이 좋아 불로초`이듯 `수필가 등단`이 되었다.
지방신문과 무명 잡지에 수년 동안 `자유기고가`라는 이름으로 글을 실어 오다 어느 날 갑자기 `수필가`라는 닉네임이 붙으니 우선 쑥스럽기도 하고 과연 `00가`를 붙여서 그 이름값을 해 낼까라는 걱정이 앞선다. 또 한편으로는 이로 인한 하나의 범주(範疇, categorie)에 갇혀 운신의 폭이 좁아지기보다 차라리 자유기고가가 낫지 않을까라는 소심함도 갖게 됨이 솔직한 나의 심정이다.
자유기고가로 있을 때는 그저 한번 잘 써보자고 하긴 했으나 언제나 습작(?)하는 기분이었고, 더 엄격히 말하면 아직도 지망생 정도로 생각했다고 해야 맞을 지도 모르겠다. 그랬는데 막상 등단이라고 하고보니 그게 아니었다. 관문은 통과했으니 그 이름에 상응하는 글을 써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중압감도 들었다.
행여 쓴 글이 졸문이 되면 어찌할까? 이 정도로 어떻게 수필가가 되었을까 라는 질책이 두려워 더욱 옴츠리게 됐으며 글감을 찾고도 쉬 써지지 않았다. 몇 번 시도해 보다가 덮어버리기도 했다. 적어도 수필가라면 이 정도는 돼야 하지 않겠나 하는, 그야말로 자격지심이 생기기도 했다. 본래 글이 연필만 잡으면 술술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등단 이전 이후가 이렇게 다를 줄은 몰랐다.
사회적 지명도만큼이나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이른바 노블레스 오블리쥬는 이럴 때나 쓰는 말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고 내가 뭐 사회적 지명도가 있다는 말은 절대로 아니다. 이거야 말로 언감생심이다.
어느 장삼이사의 보통사람이 방송에 출연했다. 자매인 동생이 가수로 유명인사가 되니 처신하기가 자유롭지 않았다고 실토하는 것을 보았다. 동네 시장에 가서는 값을 깎지도 못하고, 그 이전에 동네 목욕탕에 가서 옆에 누가 있건 말건 마구잡이로 물을 쓰기도 했지만 `가수 누구의 언니`가 되고 보니 얌전히 물도 두 손으로 퍼 쓰게 된다고 했으며, 아줌마들 특유의 수다도 떨 수 없었다고 했다. 수다를 떨어도 품위는 잃지 않으려 했다고 해놓곤 본인도 우스웠던지 파안대소를 하는 것이었다.
오늘에 와서 나를 돌아다보니 참으로 긴 시간 꿈을 가지고 먼 길을 왔다고 생각한다. 20대 초반이었던가 보다. 겁도 없이 소설가가 되겠다고 맘을 먹은 것이다. 나름으로 노력도 했으나 인생사 1%의 영감과 99%의 노력이라는데 나는 이도 저도 아닌 반거들충이가 된 것 같다. 재능도 타고 나지 않았음인지 먹은 마음만큼 따라 주지도 않았다.
그나마 생업 때문에 중도 포기도 했었다. 거창하게 저명한 어느 문인처럼 `절필선언`도 물론 아니었다. 중년이 지나가고 있었다. 무력감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러다 뜻 없이 한 생이 다가는가 하는 조급증 비슷한 것이 엄습하고 있었다. 그래서 다시 필을 잡았다.
인생사 살다 보면 길가 핀 한 송이 풀꽃을 보고도, 돋는 해 지는 달을 보고도 뭔가 느낌이 있어 글로 끼적이면 시가 되고 흥얼거려 고저장단을 붙이면 음악이 되지 않는가. 함부로 행인에 밟히며 길바닥을 구르는 낙엽도 시적생명을 불어 넣으면 시어로 탄생하지 않는가. 온 삼라만상이 문학의 소재인 것을···, 오감이 모두 글의 보고인 것을···.
중산층의 몰락 등 사회적 이슈가 생길 때마다 구상을 하고 표제만 정해놓곤 끝내 작품화하지 못한 일도 더러는 있다. 어설프게나마 꿈만 있었지 제대로 된 작품 하나 형상화하지 못했다. 너무 공허하다. 가슴이 뻥! 뚫렸다. 말 그대로 허전한 빈 가슴이다.
거두절미하고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그래도 써야 하겠지? 당연한 귀결이다. 명문이 아니어도 좋고 이목을 끌지 않아도 좋다. 내 언제 그걸 바로고 끼적였는가. 하다 보면, 쓰다 보면 명문이 나올지 누가 알겠는가라는 심경으로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아니다. 지금까지도 그랬던 것처럼 반거들충이가 되고 싶다. 아주 철저히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