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효는 `百行之源` 인간의 윤리도덕에 관해 누구나 잘 아는 말로 효는 모든 행실의 근원이다. "충신은 효자 가문에서 난다"라는 말은 "효자는 충신 가문에서 난다"라는 말과 거의 동의어처럼 들린다. 그래서 `聖雄`이라 불린 이순신은 忠孝義仁勇을 겸비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의 고대문학은 권선징악의 윤리를 가르치는 것으로 쓰인 것이 여럿 있지만, 그 중에서 효를 주제로 한 `沈淸傳`은 대표적인 것이다. 심청전은 남녀간 사랑을 주제로 한 춘향전과 쌍벽을 이루는 대표적 문학이기도 하다. `장화홍련전`은 계모의 학대에도 효를 다한 두 자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 교훈서이기도 하다. 효를 최고의 윤리로 가르치는 유교에서는 불효를 3,000 가지 죄 중 최대의 범죄로 규정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791년에 가톨릭이 처음 들어왔을 때, 전라도의 윤지충과 권상연 두 사람을 부모의 제사를 폐했다는 죄목(불효죄)으로 사형에 처하여 최초의 순교자 되었다. 기독교에서는 구약성경에서 불효에 대한 벌칙으로 "죽일지니라" 규정이 수없이 많다. 세상의 법에서는 부모(尊屬)에 대한 범죄에 대해서는 加重刑으로 엄벌하는 것이 불효의 죄가 큰 것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4. 유교에서는 효가 충에 앞서는 것 유교의 五倫은 父子有親, 君臣有義, 夫婦有別, 長幼有序, 朋友有信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상 王政時代에는 왕에 대한 忠義가 중요시되었다. 그러나 5가지 인륜도덕을 말할 때는 부자유친이 군신유의에 앞선다. 인위적인 윤리로서의 충보다는 生來的인 情誼로서의 효가 우선되는 것은 인간의 당연한 본성이다. 예화: 왕이 신하들의 충성심(충 효 중 택일)을 타진하여 충신과 간신을 判別하니 모두가 왕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였다. "강물에 상감과 아버지가 빠져서 그 중 한 사람밖에 살릴 수 없는데 누구를 살리겠느냐?"는 질문에 오직 한 사람만이 "아버지를 건지고, 상감과 함께 죽겠습니다"라 대답하였다. 그는 효충을 다 실천할 것을 말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매년 5월에 어버이날을 지키며, 어머님의 은혜라는 노래도 부르며, 효도를 다짐하기도 하지만 그 실천은 잘 하기가 어렵다. 미국에서는 어머니날(5월)과 아버지날(6월)을 따로 지키지만 그것은 거의 有名無實한 것이다.   5. 효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우리가 효에 대한 윤리적인 고찰을 할 때 먼저 인식하는 것은 그것이 동양적인 윤리사상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뚜렷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유교의 五倫 가운데 첫째(`父子有親`)라는 것은 물론, 효 그 자체에 대하여 한 권의 책으로 `孝經`이 있다는 것과, 불교에서도 `父母恩重經`이라는 한 권의 책이 있는 것이다. 그러면 기독교에서는 효윤리를 그만큼 경시하는 것인가? 결코 아니다. 그 이유는 유교와 불교가 인본주의 윤리를 가르치는 것과는 달리 기독교는 神本主義 윤리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독교적 특색은 구약성경 십계명 내용을 보아서 알 수 있다. 즉 십계명은 제1계명에서 제4계명까지는 `神倫` 곧 하나님에 대한 윤리를 말하고, 그 다음으로 여섯 계명은 `人倫` 곧 인간윤리를 말하고 있는데 그 첫째가 효 윤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독교의 특색은 신약성경 에베소서 6장에서도 암시적으로 나타나 있다. 즉 바울은 부모에 대한 자녀의 순종 즉 효를 논할 때 "주 안에서"라는 단서를 붙였고, 동시에 부모가 자녀를 양육할 때는 "주의 교양과 훈계"로 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주의 깊게 볼 것은 십계명을 크게 二大分하면 무엇을 하라는 `명령`과 하지 말라는 `금지`가 있는데, 제5계명 이하의 인륜에서는 제5계명만 명령이고 나머지는 다 금지인데, 제5계명 바로 다음의 제6계명이 살인하지 말라는 것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즉 십계명에는 그 각각에 다 반의적(反意的)인 의미를 붙일 수 있으니(예컨대 "효도하라"는 "불효하지 말라"와, "살인하지 말라"는 "남의 생명을 존중하라"처럼) 그렇다면 부모에게 불효를 하는 것은 살인을 하는 것보다 더 중한 죄임을 암시하고 있다. 한편 "주 안에서 순종하라"는 구절은 부모에게 효를 하는 것이 인륜 중에서는 가장 큰 것이지만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에 대한 윤리에 우선할 수는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에 기독교가 처음으로 들어왔을 때(당시로는 가톨릭) 기독교는 조상의 제사를 폐지하는 불효의 종교라고 하여 박해를 한 것은 참으로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우리 민족이 일제치하에 있을 때, 한민족은 철저하게 日皇을 신격시하도록 정신교육을 받았다. 그때 일제는 국민으로 하여금 매일 소위 "皇國臣民의 誓詞"를 하게 했는데, 그것은 1) "나는 대일본제국의 신민이다", 2) "나는 마음을 합하여 천황폐하에게 忠義를 다 한다", 3) "나는 忍苦鍛鍊하여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된다"이다. 이 신민의 서사에서는 효사상이란 전혀 없고, 오로지 신격시되는 천황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는 것밖에 없다. 그러기에 일본군인은 전쟁터에서 적의 총탄에 맞아 죽을 때에도 "천황폐하 만세!"를 불렀다. 한편, 명치천황의 "교육에 관한 勅語"(임금의 가르침)에는 "나의 신민은 충의를 잘 하고 효를 잘 하여..."라고 효를 언급하였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忠 다음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최종편집:2025-07-11 오후 02: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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