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그녀가 세상을 떠났을 때 목포시는 목포 개항 이래 최초의 시민장을 치러주며 그녀에게 최상의 조의를 표했다. 연결식엔 3만여 시민이 쏟아져 나와 그녀의 가는 길에 `목포의 눈물`을 쏟았다. `한국고아의 어머니`로 불리는 윤학자(尹鶴子), 본명 다우치 치즈코(田內千鶴子), 1912년 일본 고치시에서 태어나, 부친이 조선총독부 관리인 관계로 7살 때 한국 목포로 건너왔다. 20살 때 부친과 사별해 모친이 조산부 일을 하면서 생활을 꾸려나갔다. 목포고등여학교를 졸업하고 목포정명여학교 음악교사로 일했다. 1936년, 은사 다카오 선생 소개로 고아 수용 시설인 목포공생원에서 봉사하게 되었고, 2년 후 공생원 원장인 윤치호의 인품에 반해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와 결혼했다. 공생원은 1928년 `거지대장`이라 불린 윤치호 원장이 설립한 고아원으로서, 그가 목포 개척 전도 당시 다리 밑에서 떨고 있는 7명의 아이들을 거둬 자신의 집으로 데려온 일에서 시작된 고아원이다. 1945년 우리나라가 식민통치에서 해방을 맞자 남편과 함께 목포에 남은 그녀는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박해를 받았다. 하지만 거기에 맞선 이가 공생원 아이들과 졸업생들이었다. "일본인지만 우리에게는 소중한 어머니다"하며 온몸으로 그녀를 지켰다. 아이들을 끌어안으며 애정을 보여준 어머니를 모두 좋아한 것이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많은 고아가 생겨, 공생원도 고아들로 넘쳐나 원장은 500명의 아이들의 먹거리를 조달하기 위해 광주로 갔다가 그 길로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다. 그녀는 혼자서 손수레를 끌고, 때로는 구걸을 하면서 그 많은 아이들을 자기 아이 4남매와 똑같이 먹이고 입히며 끝까지 지켰다. 혁명정부가 들어서자 마침내 그녀의 명성은 전국 각지에 울려퍼져 63년 4월에는 박정희 의장이 공생원을 방문하고 `문화훈장 국민장`을 수여했다. 68년에는 일본황실로부터 `남수포장`을 받았다. 65년 목포시가 수여하는 제1호 시민상을 받고, 폐암으로 눕게 되어 68년 10월 31일 57세의 나이로 그녀의 생일에 영면했다. 숨질 때까지 그녀의 손을 거쳐간 고아는 모두 3000여 명, 그녀의 헌신적인 삶이 목포시민을 감동시켰다. 그녀의 탄생 101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지난 10월 30일 서울 한복판 프레스센터에서 "`갯가의 성녀` 윤학자 탄생 101주년에 생각하는 한·일"이라는 이름으로 열렸다. 1973년 어느 날 42살의 일본인 목사 노무라 모토유키(野村基之)가 도시산업선교회(UIM)의 소개로 청계천 하류 개미마을에 갔다. 둑 아래 땅을 파고 얼기설기 지은 움막 집들에 1600여 가구가 살았다. 청계천을 따라 6만여 명이 살던 빈민촌에서도 가장 비참한 곳이었다. 거적문을 들치고 들어간 쪽방에 열댓 살 소녀가 누워 있었다. 옆구리와 무릎에 드러난 하얀 뼈에 파리떼가 새카맣게 달라붙어 있었다. 노무라 목사가 소녀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소녀는 눈만 굴리며 쳐다볼 뿐이었다. 그는 "예수가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고 했다. 소녀는 두 달 뒤 숨졌고, 노무라가 찍은 사진 속에 남아있다. 그가 1970년대 청계천 밑바닥 삶을 담은 사진 500여 장으로 얼마 전 `노무라 리포트`를 냈다. 그는 1984년까지 한국을 50차례 드나들며 빈민을 도왔다. "일제침략이 없었다면 6·25도 없고, 청계천 빈민도 없었다"고 말했다. 도교 자택을 팔아서 빈민 구제와 탁아소 비용으로 사용했다. 박정희 정부가 청계천 일대 빈민촌을 철거하자 김진홍 목사 등과 협력해서 경기도 남양만 공동체 건설 이주비 수억 원을 마련하여 빈민선교에 젖줄을 댔다. 서독과 호주 교계를 찾아가 지원을 호소, 탁아소 건립 비용과 2000명의 절대 빈곤층 아이들을 20년간 매일 식사를 제공받을 수 있는 급식비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아울러 남양만 이주 철거민들의 자립을 위해 뉴질랜드를 수 차례 방문, 종자 소 600 마리와 최신 농기구를 들여왔다. 80년대까지 한국으로 부친 돈이 7500만 엔, 80억 원이 넘을 거라고 한다. 그는 5살 때 부친을 여의고 친척 등에 얹혀 살면서 외로움과 고통의 세계를 경험했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 재일 한국인에게 `조센진`이라며 차별하는 현장을 목격하면서 이상한 느낌을 갖게 되었다. 미국 켄터키 신학교와 바이올라 신학대학원 유학 시절, 미국인들로부터 `잽`으로 불리는 등 인종차별을 겪게 되면서 한국인들을 찾아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일어나 1968년 무작정 한국을 찾았던 것이다. 작년 2월 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을 찾아가 무릎을 꿇고 일본군 위안부 동원을 사죄하고, 일본정부에게 사죄하라고 하면서 "일본에 역사의식이 없다면 희망도 없다"고 외쳤다. `청계천 빈민의 성자`로 불린 그가 지난 10월 28일 서울시로부터 `명예시민증`을 받았다. 정치인들의 맥목과 아집 때문에 한·일관계가 점점 나빠져가고 있다. `갯가의 성녀` 윤학자 여사와 `청계천 빈민의 성자` 노무라 목사를 생각하면서, 한·일 관계가 회개하고 용서하며 창조적인 `미래`로 눈을 돌리기 바란다. (2013.11.12)
최종편집:2025-07-11 오후 02: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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