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이 창제한 훈민정음은 자음(초성)17자, 모음(중성)11자 모두 28자인데 자음은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떠서 만들어졌다. 어금니 쪽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형상(ㄱ)인 어금닛소리(牙音), 혀가 윗잇몸에 닿는 형상(┗)인 혓소리(舌音), 입술 모양의 형상(□)인 입술소리(脣音), 이의 형상(∧)인 치음(齒音), 그리고 목구멍의 형상(○)인 목소리(喉音)의 다섯 글자(ㄱㄴㅁㅅㅇ)가 자음의 기본 글자이다. 여기에 각각 획을 더하여 ㄱㅋ/ㄴㄷㅌㄹ/ㅁㅂㅍ/ㅅㅈㅊ△/ㅇㆁㆆㅎ 17자가 된 것이다. 모음은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를 본떠서, 하늘의 둥근 모양(ㆍ), 땅의 평평한 모양(ㅡ), 사람의 서있는 모양(ㅣ)을 기본 글자로 삼았다. 여기에 음양의 대립으로 배합함으로써 초출자(初出字) ㅗㅏㅜㅓ, 재출자(再出字) ㅛㅑㅠㅕ를 더하여 ㆍㅡㅣ/ㅗㅏㅜㅓ/ㅛㅑㅠㅕ 11자가 된 것이다. 그리하여 모두 28자인데 1933년 지금의 한글학회 전신인 조선어학회에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제정하면서 、ㅿㆁㆆ 넉 자를 제외하여 24자가 되었다. `업`의 초성인 ㆆ와 `읍`의 초성인 ㆁ는 `욕`의 초성인 ㅇ와 비슷하고, 중성 、는 ㅏ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ㅿ는 영어의 z음과 비슷한 것인데, 이 글자가 없어지면서 남쪽에서는 `마?`이 `마슬`로, 서울 쪽에서는 `마을`로 변했다." 60여 년 전 양주동 교수의 훈민정음 창제에 관한 명강의 노트의 일부다. 세종 10년(1428년) 진주 사람 김화라는 이가 제 아버지를 살해했을 때 세종대왕은 통탄했다. "모두가 나의 잘못이다." 국왕으로서 만백성이 성인의 도를 잘 따르도록 가르쳤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자괴감이었다. 그래서 대왕은 역대 충신과 효자를 가려뽑아 그 행실을 편찬하고, 글 모르는 백성을 위해 그림도 곁들여 편집하도록 했다. 그로부터 6년 뒤 발간된 것이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다. 그러나 패륜 사건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림을 붙였으나, 백성이 글을 모르니 그 뜻을 어찌 알 수 있겠느냐." 그 후 왕은 칩거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9년 뒤 (1443년 12월) 대왕은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글자 28자를 불쑥 제시했다. "이 달에 임금이 28자를 지었는데…. 이것을 훈민정음이라 불렀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25년 12월 맨 마지막 조에 날짜 없이 적힌 대목이다. 그동안 세종대왕은 훈민정음 창제에 밤낮으로 심혈을 쏟았다. 그로 인해 안질이 나서 이를 치료하기 위하여 청주 초정에 거동할 때, 농사철 민폐가 없도록 모든 절차를 열에 아홉은 덜고 정무까지도 다 의정부에 맡겨버리게 되었는데, 훈민정음의 연구 발명의 일만은 요양을 위주하는 행재소(行在所)에까지 가지고 가서, 쉬지 않고 연구에 골몰하였다. 훈민정음이 완성되자 그 창제 목적을 실천하기 위하여 궁궐 내에 정음청을 설치하고 대제학 정인지를 비롯하여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이개, 이선로 등 집현전 학사 7인과 돈녕부 주부 강희안을 합하여 8인으로 하여금 글자를 다듬고 창제 원리와 해례, 용례를 정리하도록 했다. 오늘날 우리 생각에는 그때 조야가 훈민정음 창제를 크게 반기고 기뻐하며, 대왕의 성덕의 가이없음을 우러러 기리어 마지아니하였을 것 같지만, 사실은 이와 반대로, 곧 반대 의론이 크게 일어나 그 시행에 이르기까지 파란 곡절이 많았다. 사대부와 유생들의 분위기는 험악해졌다. 부제학 최만리는 장문의 상소를 올렸다. 왜 사대(事大)에 거스르며 엉뚱한 일로 국정을 혼란에 빠뜨리려 하느냐는 것이었다. "모두 옛것에 반대되니 만일 중국에라도 흘러들어가 비난을 사게 된다면 어찌 대국을 섬기고 중화를 사모하는 데 부끄러움이 없다 하겠습니까. …새 글자를 따로 만드는 것은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오랑캐와 같아지려는 것이니 어찌 문명의 큰 흠이 되지 않겠습니까.…" 왕의 멱살을 움켜쥔 것이나 다름없었다. 중국 운운한 것은 폐위 위협이었다. 정창손, 하위지, 김문 등 집현전의 주력 학사들이 그와 함께 했다. 세종은 새 글자로 `삼강행실도` 언해본을 편찬하도록 응교 정창손에게 지시했다. "언문으로 삼강행실을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가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 효자, 열녀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이다." 정창손은 이렇게 되받았다. "그럴 리 없습니다. 사람이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은 사람의 자질 여하에 있는 것인데, 어찌 꼭 언문으로 번역한 후에야 사람이 모두 본받을 것입니까." 대왕은 최만리와 그에 동조하는 직제학 신석조, 직전 김문, 응교 정창손, 부교리 하위지 등을 불렀다. 여전히 기세등등했다. 백성이 글자를 알아야 송사에서 억울함을 줄일 수 있는 것이 아니냐는 대왕의 설명에 "그건 관리의 자질에 달려있는 것이지 백성이 글자를 알고 모름과 무관합니다"라고 맞받았다. 대왕은 더 단호했다. "지금 쓰는 이두(吏讀)도 본뜻이 백성을 편하게 하려 함이다. 그러나 이두도 한자에서 따온 것이어서 백성이 알기 힘들다. 내가 만든 문자도 백성을 편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너희는(이두를 지었다는 신라의) 설총은 좋아하고, 너희들이 섬긴다는 임금은 그르다 하는가. 너희가 운서(韻書)를 아는가, 사성(四聲)·칠음(七音)에 자모(字母)가 몇이나 있는지 아는가." 정창손의 언설을 거론한 뒤 "진실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자들"이라며 의금부에 하옥시켜 버렸다.
최종편집:2025-07-11 오후 02: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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