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10대 선조 죽헌(휘 恒慶 아호 竹幹) 공의 삼부자, 즉 수하삼현(水下三賢)의 문집 국역본 교정을 보고 있던 어느 날 조선일보에 `가야산을 바라보고(夙夜齋望倻山)`라는 시문이 원문과 함께 실렸다.
"큰 산의 진면목을 안 드러내고/기묘한 한 모퉁이 살짝 보였네/조물주의 깊은 뜻을 잘 알겠거니/천기를 까발려서 다 보여줄까?"라는 시였는데, 작자는 조선 선조 때 저명한 유학자 한강 정구(1543~1620) 선생이었으니 여기 내 시선이 딱 멈췄다. 그것은 나의 선조 죽헌(竹軒) 공이 법산에 복지를 정하여 세거하게 된 것이 바로 한강 선생이었기 때문이다.
내 고향 성주 법산! 고향 얘기 할 때마다 남녘의 영산 가야산 정기를 빼놓을 수가 없으며 누구나 그 맥맥(脈脈)히 흘러내린 정기를 타고 났다고 찬미한다. 모두가 신령스런 그 영산을 심미안이 아니면 볼 수 없는 참모습을 한강이 녹여 낸 시문이었으니 어찌 나의 폐부를 찌르지 않았겠는가. 한 선현의 시문 한편을 두고 천학(淺學)인 내가 감히 그 느낌을 적는다는 것이 언감생심이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그 정기 받고 자라났으니 그 웅자에 대해 내 평소 가슴 속에서만 끓어오르는 시심을 어떻게 형상화 할까 고심만 하던 터에 한강의 절절히 묘사한 시문을 보고 그만 매혹이 됐다는 말이리라.
더 큰 이유는 따로 있다. 죽헌 공 선대 휘 정(淨)께서 선영 성묘차 남행했다가 작천정사에서 돌아가시니 공이 3년 시묘살이를 했으며 장례 후 원래 사시던 고양 원당으로 돌아가려 했을 때 어머니께서, 굳이 벼슬에 관심이 없다면 돌아갈 이유가 없지 않겠느냐 했다. 그렇다면 도학이 높은 한강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함이 어떠냐고 하여 정착한 곳이 내 고향 법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강 선생이 누구신가? 우리 성주가 낳은 당대의 명문장일 뿐만 아니라 경학을 비롯하여 산수, 병진, 의약, 풍수에 이르기까지 정통했으며 예학에 뛰어나 이에 관한 저술도 많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유일(遺逸)로 천거되기도 했고 관직에는 처음으로 창녕현감에 부임하였으며 충주목사를 지냈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최근(2009년)엔 이런 일도 있다. 대원군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던 경남 창녕 관산서원 터에 묻혀 있던 신주를 발견했는데 여기에 영남오현의 한 분인 한강의 위패(신주)가 봉안돼 있었다는 사실이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을 나만 모르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이를 보아 한강의 풍모를 가늠하게 되고, 남도 온 사림의 숭모가 어땠는지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대현 한강 선생은, 선영이 있는 곳인데 왜 굳이 한양이냐고 하였으니 한강의 뜻에 따라 문하에서 수학하기로 결심하기에 이르렀으며 이로부터 한강의 고제(高第)가 되었다.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학문에 힘쓰고 스스로 경계하는 글을 지어 절차탁마(切磋琢磨) 하였다. 그때부터 스승 한강은, 죽헌을 보고 덕구(德久·죽헌의 字)는 논지가 정대하여 풍의가 순후하고, 덕기가 두텁고 재주가 남달라 높은 도덕심에 학문하는 이치를 통달했으니 자품을 높여주어야 하며 독실한 행의에 여러 제자들은 덕구를 미칠 수 없다고 찬탄하기도 했다.
이후 덕업을 쌓아가는 덕구를 본 한강은 유림에 큰 논의가 있으면 꼭 덕구를 참여케 하고 수하장과 더불어 의논하라 했다. 수하장이란 한강보다 대가천 물아래에 산다는 칭송의 의미였으니 이로 미뤄보아 한강과 죽헌의 사제의 신망이 얼마나 두터운지를 알게도 한다.
죽헌은 경전을 쌓아두고 후학을 훈육하며 벗들과 강론에 몰입하고 오직 학문 궁구에만 전력하니 어머니가 보고, 그래도 선비란 벼슬을 해야 하지 않겠나 하니 46세에 가서야 사마시(司馬試)에 올랐다. 학문이 깊어지며 오암반석에 정자를 지어놓고 백매원에서 대나무 몇 그루를 이식해 놓았으니 그 아름다움과 변하지 않는 푸른 절개와 함께 산다는 좌우명으로 이때부터 죽헌이라 자호했다. 더 나아가 일렁이는 댓닢소리, 베갯머리서 들리는 개울물소리, 초동어부의 노랫소리 듣는 경지를 일러 불환삼공(不換三公·삼정승과 바꾸지 않는다)이라 하며 지은 시문이 오암계정운(鰲巖溪亭韻)이니, 이 시문이야말로 우리 죽헌 공이 도학이 높고 호학훈몽(好學訓蒙)의 선비정신의 표상이 되었음을 알게 한다.
또 죽헌이 유림의 절대적 신임으로 중임했던 천곡서원장직을 사임코자 했지만 한강이, `책임이 막중한 원장은 그대가 맡지 않으면 안 된다`며 극구 만류했다고 한다.
죽헌은 노년에 이르러서도 정진 면려하였고 후생들을 가르칠 때는 경(敬)·리(理)·지(智)를 정연히 설파했으며 유사의 기록으로 보아 시문과 문집 4권2책을 남겼다는데, 임진왜란 때 어머니를 모시고 가야산 백운산성으로 피난할 때 병화를 당하여 소실됐다고 한다. 참으로 두고두고 안타까워해야 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죽헌 공이 두 아들을 두셨는데 장자는 휘는 은, 자는 사행(士行), 호는 관봉(鸛峯)이고, 둘째 아들은 휘는 린, 자는 사발(士發), 호는 매와(梅窩)이다. 두 형제도 선친 따라 자연스레 한강 문하에서 수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