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죽헌은 두 아들과 손자 월주 공에게 고령창의소(국난을 당하여 의병을 일으킴)에 출진할 것을 명하여 문경까지 진출하였으나 남한산성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에 문인 김응려와 함께 산정에 올라 북향 통곡했으며 이때 지은 통분시가 남아있다. 그로부터 `게을렀다`라고 자책하며 나광자(懶狂子)라 자칭했다. 별호와 더불어 아호 관봉을 자호하게 된 연유도 있다. 법산 동쪽에 수려한 산이 있고 그 골짝에 맑은 샘물이 흐르는데 황새가 그 물을 날마다 먹는 것을 보고 심신이 상쾌하여 오묘한 자연의 섭리에 심취하다 보니 이에 감응하여 관봉이라 자호했다. 만년에는 더욱 경전에 몰입하여 덕량을 함양하였다. 관봉집에 150여 수의 시문이 실렸으며 차운과 증답시, 만시 등으로 보아 사림 사이에서도 교우관계의 신망이 두터웠음을 알게도 한다. 둘째 아들 린은 일찍부터 총명·지혜로워 8세에 글을 익혔으니 한강은 두 형제를 영재로 칭찬했다. 일찍이 여헌 장현광을 좇아 물자설(勿字說)을 지었으며 퇴계이선생변무소를 써서 동료 문인들을 놀라게 했다. 또 훌륭한 문장력으로 저술도 많았다. 춘정편략, 상제예설, 가례의절, 대학인의, 독서휘록 등이며 특히 춘정편략서는 본문이 전하지 않아 그 진가를 가늠해볼 뿐이니 유감이 아닐 수 없다. 그밖에도 동국명신록후 등 저술이 많지만, 특히 성주 출신 순절의사 이사룡에 대한 기록과 제문은 모름지기 사대부의 절의사상이 강하게 나타나있어 매화의 기개가 넘친다고 칭송하고 있다. 호란 때 백씨 관봉이 나광자라 별칭 했듯 매와도 강화 소식에 통곡하며 치광자(癡狂子)라 별호했다. 이도 형제가 같았으니 나라사랑 그 충정을 알게도 한다. 또 매란국죽이 올곧은 선비의 별칭이듯 매와도 정원에 매화를 심어놓고 겨울을 이겨내어 꽃 피우는 그 고고함에 매료되어 탐닉하다 보니 매와라 자호했다. 매화사랑이 극진하여 매화시 100여 수를 남긴 이퇴계가 연상됨을 구태여 피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두 형제가 선친 따라 한강 문하에서 동문수학을 하게 된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만큼 자품이나 학문에 있어서 출중했기 때문이었을 것이 아니겠는가. 이는 오늘날에도 별로 다를 것이 없지만 특히나 수기치인(修己治人)을 근본 덕목으로 하는 조선 유교사회에서는 스승과 제자가 엄정한 사이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스승과 제자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주고받음의 관계가 아니라 그 이상의 관계여야 하며, 지금 너무 흔히 쓰는 `맨토`와는 천양지차가 있다는 말이다. 게다가 오늘의 극히 일부 혼탁한 사제의 상(像)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은 린 두 형제도 선친과 마찬가지로 도학을 숭상하고 학문과 저술에만 전념했으므로 출세 지향의 벼슬에는 뜻을 두지는 않았으나 사마시에는 동시에 올랐다. 그야말로 연벽등과(형제가 동시에 과거 급제함)를 한 것이다. 두 형제의 학문이 원숙해져갈 무렵 한강은 죽헌 삼부자에게 예설 편찬의 소임을 맡겼으므로 무흘 산천암정사에 가서 저술 작업에 동참 진력하였다. 이를 본 백매원의 많은 선비들이 죽헌 삼부자의 학문의 깊이를 알 수 있다고 찬탄했으며, 그래서 한강은 죽헌을 수하장이라 칭송하고 삼부자를 수하삼현이라고 칭했는데 바로 여기서 연유한 것이다. 스승이 제자를 이렇게 칭송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수하삼현! 이를 두고 중국 당송팔대가에 든 소씨 일가의 삼소, 즉 소순·소식·소철에 비유되기도 한다. 공교롭게도 아버지 소순에다 소식 소철 두 형제가 동시에 진사시에 급제한 것을 두고 이에 뭐라 더 사족을 붙일 이유가 있겠는가. 한강이 돌아가셨다. 두 아들과 함께 친상과 다름없는 3년상을 치뤘으며 여러 동문들과 온 사람이 나서서 6년에 걸친 회연서원 건립을 주관했다. 죽헌이 한강의 수제자이니 이때 모인 천여 유림들은 죽헌을 초대 원장으로 추대하였다. 앞서 언급한 천곡서원과 함께 양대 서원장을 역임한 것도 죽헌의 덕량을 가늠케 한다. 뿐만이 아니다. 거유 남명 조식의 위패 봉안식, 안동 여강서원 이퇴계 위폐 봉안식, 성주 오현승무에의 참여 등의 발자취와, 향내뿐만 아니라 남도의 여러 유현들과의 교유도 있어 오늘의 각 유림에서 큰 가르침이 되고 있다. 죽헌도 79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돌아가신지 90년이 지나서 온 고을의 선비들이 죽헌의 덕행을 사라지게 할 수 없다고 하여, 평소에 강학하던 곳에 사당을 세웠는데 지명에 따라 운암서원이 되었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가 현재의 남은리 강정 자라바위 반석 위에 오암서원이 창건되기에 이르렀다. 또 증손 위가 춘천도호부사에 오르니 통훈대부 제용감정으로 증직도 되었다. 서원이 창건되니 성호 이익과 대산 이상정이 묘도비명을 쓰고 야성 송이석의 세덕사(서원 부속건물) 상량문, 응와 이원조가 유허비명 등을 찬술했다는 것은 죽헌의 학덕이 어떠했는지를 알게도 한다. 오늘의 학교 교육을 받았으면 다 알 수 있는 성호사설의 내용이 역사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는 사실과, 지금 학계에서는 대산 이상정이 퇴계 학맥을 이어온 저명한 학자라고 일컫고 있는데, 이런 분들이 묘도비명을 썼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또 대산 이상정은 "죽헌은 한강을 따라 위기지학에 뜻을 두고 독신역행하여 순정한 학문과 관후한 덕행이 가장 높았으므로 `은군자(隱君子)`라는 평을 받았다"라고 그의 시문에서 밝히기도 했다. 나의 선조 죽헌공의 사적을 제한된 지면에 다 열거할 수 없음이 유감이지만, 다만 한 가지는 그 학덕으로 관면(冠冕·벼슬길)에 나서셨더라면 아마도 대경세가(大徑世家) 아니면 경상(卿相)의 반열에 오르지 않았을까 하는 조심스런 소회를 적어보는 것이다. 이런 예는 현세에도 다를 것이 없다. 장준하 선생과 독립운동을 했으며 고려대학교 총장을 지낸 김준엽 선생이 연상됨을 어쩌지 못한다. 바뀐 대통령마다 그의 인품을 보고 총리에 오르라고 종용을 했으나 끝내 고사한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2007년 5월 17일 오암서원 중건 복원향사를 성료했다. 서원 창건 이래 향사를 봉행해 왔지만 새로 단장한 서원에 죽헌 공을 주벽(主壁)으로 하고 장자 은, 차자 린 삼부자를 배향 행사를 치루고 보니 새삼스레 앞서 언급했던 대로 명실공히 수하삼현이 되고 더 나아가 중국의 삼소에 비유되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음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한다. 또한 삼부자가 한 서원에 불천위로 제향한다는 것은 국내 어느 서원에도 없는, 우리 오암서원이 유일하니 숭모의 마음을 더욱 갖게 한다.
최종편집:2025-07-11 오후 04:4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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