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일생을 살아가는 틈틈이로 순간이지만 가볍게 뒤를 돌아보게 된다. 그 속에는 애석한 것도 있고 안타까운 일도 있는 것이 우리들 인생사이다. 무슨 거창한 담론이 아니라 가벼운 일화 정도의 것도 있고 두고두고 아쉬워할 것도 있다는 말이다.
어느 날 유력 일간지에 전면 책 광고가 실렸다. 그것도 며칠 사이를 두고 서너 번이었다. 바로 이어령(李御寧)의 `생명이 자본이다`라는 책이었다.
이분의 이름 석 자를 안다는 것은 1960년대 초로 기억한다. 당시 서울신문에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라는 제목의 연재 글이 실렸다. 그땐 글쓰기에서의 장르라는 것이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아마도 수상록 정도가 아니었을까 한다. 그때 난 문학이 뭔지도 모르면서 소설을 쓰겠다고 지인에게 말했더니 그는 첫마디가 다독, 다사(多讀·多思)가 필수라고 조언을 주는 것이었다. 그 어렵던 6·25 휴전 이후 어디 읽을거리나 변변히 있었을까만 내겐 당시 서울신문을 매일 볼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그건 수륜면사무소에 봉직하셨던 백형이 퇴근 시 신문을 가져왔기 때문이었다.
내 20세 전후의 감수성이 예민할 때 하도 감명이 남달라 정독을 했지만 정작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니 그 내용이 뭐였던지는 뇌리에 남은 것이 하나도 없다. 다만, 표제가 말하듯 이 온 우주 삼라만상이 인간 사유(思惟)의 토양이 되어 그 속에 삶이 있고 철학이 있다는, 뭐 이런 게 아닐까라는 짐작만 할 뿐이다.
한 번 보고 버리기 아까워 스크랩을 시작했다. 정확하진 않지만 한 60여회 연재했던 것을 시간이 날 때마다 다시 읽기도 했었다. 지금 같았으면 스크랩북을 만든다던지 표지라도 씌워 건사했을 것인데 모든 게 부족했던 시절 그냥 실로 꿰매어 잡다한 책 속에 끼워두었었다. 당시엔 애지중지(?) 했지만 50여 년이 흐르는 동안 어디서 어떻게 없어져버렸는지도 전혀 알 길이 없어 참으로 안타까움만 남는다.
이분의 저작물이 어디 한둘일까만 유독 그것만 안타까운 것은 당시를 회상할 수 있는 내 개인사의 한 편린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지금도 소장하고 있다면 글 내용의 문학적 가치라든가 사회사적(社會史的) 의미가 크다는 뜻도 있지만 더 큰 의미는, 순전히 20대 때의 아주 작은 내 모습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것 때문이다.
한국의 대표지성으로 자리매김한 이분을 지금도 신문·방송에서 대할 때마다 내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 몇몇이 있다. 당시 우리 국어의 중복어에 관한 것인데 `외가`냐 `외갓집`이냐를 두고 30대 초반의 이어령 서울대 강사와 학계 원로 교수가 논쟁이 붙었다. 원로 교수는 중복어이니 외가로 해야 한다고 했고 반대로 신예 이어령 강사는 해박한 논리를 펴 원로 교수의 논지를 이긴 일은 너무도 유명하다. 그래서 `외갓집`이 표준어가 된 뒷얘기가 있다는 것을 빼놓을 수가 없다.
초대 문화부 장관, 88올림픽 때의 굴렁쇠, 근년에 와선 따님 이민아 목사가 죽음을 앞두고 아버지에게 기독교에 귀의할 것을 간청하여 종교인이 되었다는 등 순전히 내 기억에 있는 것만 적어본 것이다. 연표를 보거나 프로필을 본 것은 더욱 아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 `흙 속에···`가 너무 강렬하였고 지금까지의 이분의 족적이 너무 크고 넓기 때문이리라.
애석한 것이 또 있다. 1952년 수륜고등공민학교에 입학했다. 조금 과장하면 지금의 대학이라고 할 만큼 내겐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었다. 일기도 썼다. 휴가 왔던 중형이 복귀하는 날엔 제목을 그땐 한자상용시대라 `형님 부대 거행(擧行)`이라 썼다가 다시 `거행(去行)`으로, 이도 아닌 것 같아 도로 擧行으로 쓴 기억도 있다. 성인이 되어 쓴 일기는 아예 없으니 추억할 것도 없다. 지금이라도 어디서 툭 튀어나오면 마치 고분(古墳)에서 유물을 발굴하여 당시의 역사를 유추하듯 할 텐데 말이다. 그 시절의 유일한 내 기록일 텐데···. 참 애석하다.
20대 초반으로 기억하고 있다. 한국 영화를 얘기할 때 이분을 빼고는 할 얘기가 없을 만큼 지명도가 높은 사람이 있으니 바로, 우리나라 영화 증흥기에 아역으로 단연코 스타덤에 오른 안성기이다.
어느 촬영장에서 우는 장면을 찍어야 하는데 그 앙증맞은 연기도 나오지 않았고 감독이 아무리 울라고 해도 도무지 울지 않는 아이를 보다 못한 아버지가 화가 나서 뺨을 한 대 때리니 우왕! 하고 울어 제대로 촬영했다는 얘기가 당시 신문 가십난에 실리었다. 요샛말로 이 얼마나 리얼한가! 화제를 몰고 다녔던 그 깜찍한 연기도 그렇거니와 거기다 보는 이로 하여금 박장대소까지 하게 했으니 그 기사를 오히려 책갈피에 넣어 놓고 볼 때마다 내게 웃음을 촉발케 한 것이다.
이 신문쪽지도 잃어버렸다. 이 배우가 아침저녁 쉽게 대할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다면 지금이라도 그걸 보여주고 정작 본인은 알고는 있는지 묻고 싶은 장난기가 발동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아예 없으니 그것도 애석한 일 중의 하나이다.
우리 현대사의 큰 소용돌이 중의 하나인 4.19혁명. 그때처럼 초등학생으로부터 온 국민이 하나 된 때는 일찍이 없었다. 마산 김주열 군의 참혹한 죽음, 고대생들의 시위, 곧이어 대학 교수들의 대대적 가두시위 등은 부정·불의의 항거와 민족정기의 표출이었다. 3·15 원흉들의 재판이 시작되어 정치깡패 이정재, 임화수가 법정에 섰다. 서슬 퍼런 검찰 논고 앞에서 우락부락, 두 눈을 부라리며 대거리하던 모습이 내가 구독하던 교양지 월간 사상계 화보에 실렸다. 특히 임화수는 목 뒤에 주먹만 한 혹(腫瘍)을 달고 있었으니 묘하게도 그 패악(悖惡)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사건은 악명 높은 자유당때의 일이지만 5·16정변 이후의 혁명재판이었으니 그 서슬은 더욱 엄혹했던 상황인데도 그 포악무도한 피고인들의 부리부리한 눈망울이 아직도 내 뇌리에 각인이 돼 있다. 조금 섬뜩했음도 부인할 수가 없다.
4·19와 5·16의 역사적 조명이 있을 때마다 그 정치깡패 사건을 떠올려 그 화보를 꺼내 보기도 했지만 지금은 이도 인멸돼버려 정말 애석하기 짝이 없다. 그야말로 실증적 역사자료가 될 텐데 말이다. 파주 출판단지 어디인가에 출판박물관이 있다니 거기 가면 유독 내게만 절실한 자료가 있을 것 같으니 그걸로 위안을 삼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