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남해안 지방에선 벌써 따스한 봄소식이 오고 있다.
난생 처음 강남상공회의소 회원들과 함께 개성 관광을 몇 년 전에 가 본적이 있다. 개성은 북한 출입소를 지나면 잠시 후 개성공업단지가 나타난다. 개성 관광의 첫 대면은 박연폭포였다. 개성시 북쪽 16km지점에 천마산과 성거산 사이에 화강암 암벽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높이 37m, 너비 1.5m로 금강산 구룡폭포, 설악산의 대승폭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폭포 가운데 하나이다.
봄의 박연폭포는 산 속 화강암 절벽 위에서 하얀 비단 폭을 늘어뜨려 놓은 모습이다. 한눈에 압도하는 큰 폭포와 달리 한 가닥 난초 잎을 보듯 선(禪)의 세계를 느끼게 한다. 우리 일행은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으나 문득 황진이의 가야금을 불러 박연폭포와 마주하고 싶었다.
개성의 다음 관광지는 선죽교이다. 개성시 선죽동 기슭의 1m도 안 될 듯한 개울에 놓여 있다. 그럼에도 우리 가슴에 충절의 다리로 각인되어 있다. 안내원은 아직도 피의 흔적이 있다고 설명한다. 선죽교는 고려말 정몽주가 이방원이 보낸 조영규에게 이곳에서 철퇴를 맞아 숨진 곳으로 유명하다. 선죽교 옆에 서니 기울어 가는 고려 왕조의 노을이 떠오른다. 고려의 마지막 보루인 정몽주는 이방원과의 마지막 담판에서 이방원이 정몽주의 마음을 떠보는 하여가(何如歌)로--
이런들 어떠리 저런들 어떠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이것은 정몽주에게 고려나 조선을 섬기기는 마찬가지로 서로 어울려 한 평생을 같이 지내 보자는 회유책이다.
이에 정몽주는 충절의 단심가(丹心歌)로--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
로 답한다.
이것은 충성의 극치라 하겠다. 생사와 국가의 존망을 앞두고 시조 한 수씩을 주고 받는 장면에서 비장미를 느끼게 한다.
개성엔 고려를 세운 왕건, 고려말 최영장군, 공민왕의 유적이 남아 있지만, 정몽주의 충절의 피를 뿌린 선죽교와 그의 생가였던 숭양서원이 가장 발길을 끌어당기고 있다.
개성은 정몽주의 혼과 박연폭포의 황진이의 미가 어우러져 고려 오백 년과 조선 오백 년이 이어지고, 다시 개성공단으로 남북이 만나고 있다. 개성의 반대쪽 눈 덮인 금강산휴양소는 남북한 이산가족의 만남이 재개되어 남북한의 봄이 서서히 오는가 보다. 요즈음 KBS1 TV의 방송드라마 사극 정도전의 하늘을 버리고 백성을 택한 역사적 무대인 개성과 우리의 명산 금강산에도 서로 왕래하며 관광하는 따스한 봄이 오길 기다려 본다.